얇은 책도 평안해보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공간 속에서 발휘하고 있는 무게의 아우라는 두꺼운 책을 이길 사물이 없다.
읽지 않는 책이라고 할지라도(브리테니커 사전같은) 집안이나 카페의 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내는 책들을 보면 ‘어쩌면 나보다 더 존재감이 확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 마련이다.
왕처럼 또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처럼 군림하는 듯 자리를 차지하는 두꺼운 책들은 도도하게 자리한다.
나는 책을 한 권 잃어버린 상태라 마음이 몹시 슬픈 상태로 3개월을 보내는 중이다. 이삿짐으로 싸둔 것은 기억이 나는데, 도통 어느 책장에 꽃혀 있는지, 어느 박스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예상이 안 간다는 것이 문제다.
이희인 작가의 <여행의 문장들 : 세 번째 이야기>라는 책인데, 독서를 좋아하기 전에 디자인 때문에 구매했던 책이라 그 만남이 참 흥미롭다.
나는 교보문고에서 책을 구매하는 편이라 에세이 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당시 ‘뭐라도 읽어야지 뭐라도 쓸텐데’ 하고 못난 나의 어휘력을 탓했기 때문에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러 코너를 기웃거렸다.
그 때의 나는 세계문학은 무슨! 멋드러지게 왼쪽 겨드랑이에 민음사에서 나온 헤르만 헤세의 책들을 끼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지만... 쪼렙이었던 나는 읽으면 ‘무슨 내용이람’ 하면서 곧 책을 닫아버리는 수준 밖에는 안 되었다.
그 때에 나의 손을 붙잡아 준 책이 바로 이 책. 여행의 문장들이다. 어떤가? 이름 자체도 낭만적이지 않은지? 우리가 좋아하는 두 가지가 붙였다. 여행과 문장.
대략적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이희인 작가가 여행을 다니는 동안 들고 다녔던 문학/비문학의 책을 줄거리와 사진으로 버무려 독자에게 여행 에세이 + 소설을 읽게 하는 아주 도움 되는 책이었다.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내가 흥미를 붙이지 못하던 많은 소설들을 다시 접하게 되었고, 정말 귀한 책들과 연결되어 지금은 해마다 한 번씩은 꼭 다시 읽게 됐다. 좋은 책은 좋은 책들을 연결해준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정말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이작가의 책이 어디에 꽃혀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책으로 인해 연결된 수 많은 책장의 친구들은 두껍든 얇든 간에 한 번씩 회포를 풀면서 인사를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 말할 수 있다. 다음에 책 짐은 꼭 내가 싸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