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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_혼자 하는 연말 준비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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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_혼자 하는 연말 준비


불현듯 ‘날씨가 갑자기 춥네’하는 기분이 들면 트리를 켤 준비를 한다.

내가 1인 가구다 보니 주변 사람들한테 트리를 켰다고 하면 깜찍한 탁상용 장식품 같은 걸 떠올리는데, 우리 집 건 그런 게 아니다. 무려 120cm의 당당한 장신(?)을 자랑하는 중형 트리다.


먼지 쌓인 박스에서 가지런히 접혀있는 트리를 꺼내 가지를 하나하나 펴 주고, 여기에 알록달록한 오너먼트를 장식한다. 오너먼트 가운데 몇 개는 여행 중에 사 온 것들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질감에 애틋함이 밀려온다. 마지막으로 트리 꼭대기에 별을 달고 전구를 두른 뒤 드디어 점등. 반딧불처럼 천-천히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지는 그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연말엔 집에서 혼자 트리를 켜놓고 멍 때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한 해를 정리하는 나만의 의식이자 힐링인 셈이다.


내가 트리를 켠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 10번째 집에서부터다. 10번째 집은 학교 근처에 있던 고시원으로 내가 기숙사를 나와 처음으로 구한 집이었다. 고시원 치고는 방이 넓고 창문도 있어서 좋았지만 화장실과 샤워실이 각 층에 하나뿐인 게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아무튼 공동생활에서 벗어나 처음 내 방을 갖게 됐으니 인테리어 욕심에 불타올랐고 급기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직접 트리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건 트리라기보다는 에펠탑 형태의 조명에 가까웠다. 굵은 철사로 에페 탑 같은 사각뿔 형태를 잡아준다. 얇은 철사로 4개의 면을 얼기설기 얽어주고 원하는 색깔의 털실로 철사와 철사 사이를 마구 휘감아 준다. 끝으로 전구를 둘러주고 원하는 오너먼트로 장식하면 끝. 만들 때는 어설퍼 보여도 막상 불을 켜면 꽤 예뻤다. (혹시 도전하려는 분이 있다면, 털실은 밝은 색을 추천한다. 그래야 더 밝아 보임) 비록 누추한 고시원 방이었지만 노란 전구색으로 물든 트리가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방 안에 온기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곧바로 나는 트리 점등 식에 중독되고 말았다.


몇 년 정도는 트리 없이 살기도 했다. 하지만 웬만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트리를 켰다. 심지어 중국에서 생활하던 2009년에는 초록색 반짝이 모루(반짝이 포장지를 가늘게 채 썬 것같이 생긴 기다란 끈 모양의 트리 장식)를 사다가 벽에 트리 모양으로 붙여놓기도 했다.


트리를 보며 올 한 해 일어난 일을 돌이켜본다거나, 내년을 설계한다든가, 뭘 반성한다든가 하는 일 따윈 절대로 없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바라만 본다. 그러면 내 안에 마구 흩어져있던 감정과 기억이 눈이 내리듯 저마다의 제자리를 찾아내 안에 가만히 내려앉는 것 같다. 종이에 뭘 적고 계획표를 짜지 않아도 자동으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과 기억의 눈이 소복소복 쌓이면 그 위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둘씩 떠오른다. 평소엔 까맣게 잊고 살았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있기에 올해도 얼마나 다행이었나. 정말, 정말로 다행이다.


지난해 겨울에는 지인에게 선물 받은 작은 탁상용 트리를 엄마에게 다시 선물했다.

장식에 별 관심이 없는 엄마지만 그런 그녀도 손바닥만 한 트리를 엄숙하게 점등하고선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나처럼 엄마도 올해는 혼자 트리에 불을 켜면서 한 해를 정리하시겠지.

세상의 모든 혼자 사는 사람들의 집이 어스름한 전구색으로 물드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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