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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_한옥 로망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한국가구박물관. 한 번 다녀오면 한옥 로망이 불타오른다.


12_ 한옥 로망


“저 오랜 꿈이 하나 있어요.”


“뭔데?”


“중정이 있는 한옥에서 사는 꿈이요. 서울에서요.”


“… 집순아 그건 이 시대 모든 사람의 로망이란다.”


그는 마치 닿을 수 없는 꿈인양 이야기했지만, 로망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늘 있다!

내 회사 동기 중 한 명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몇 년 전 결혼한 그는 신혼집으로 서촌에 있는 한옥 전셋집을 선택했다. 동기의 말에 따르면 한옥을 사는 것은 가격이 비쌀뿐더러 매물도 별로 없지만, 전세는 생각보다는 저렴하고 선택지도 꽤 있다고 했다. 한옥 전세가 저렴한 이유는 리모델링이 전혀 안돼 살기에 불편한 점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안타깝게도 그는 한옥 생활이 어떤지 물을 때마다

“주말에 관광객들 때문에 쉴 수가 없어”

“옆집이 카페라 밤에도 너무 시끄러워”

라며 고통을 호소하더니 결국엔 아파트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역시 현실은 쉽지 않은 것일까? 어릴 적 벽에 타일이 붙은 개량식 한옥에서 살았던 나의 지인도 내가 한옥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무슨 귀신의 집을 이야기하듯이 겁을 주곤 했다.

“니가 생각하는 한옥은 드라마 속의 한옥이고. 너 벌레랑 쥐, 겨울에 사방에서 들어오는 칼바람 같은 거 감당할 수 있겠어?”


이후로 한참을 한옥 로망을 이룬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회사 부장님 중 한 분이 한옥으로 집을 옮겼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살고 있던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한옥으로 들어간 부장님은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차까지 팔았다고 한다. 집을 내놓은 거야 한옥으로 들어갈 돈을 마련하려면 당연한 일이지만 자녀가 있는 50대 직장인이 차를 처분한 것에는 좀 놀랐다.


어쩌면 로망을 실현하는 관건은 ‘어떤 조건을 갖췄느냐’가 아니라 ‘뭘 포기할 수 있는지’ 일지도 모른다.


북촌에서 서촌, 서촌에서 다시 익선동으로 이어지는. 요즘 사람들이 한옥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한옥은 점점 더 젊어지고 트렌디해지는 것 같다. 과거에는 서양의 모든 것이 무조건 선진 문물처럼 여겨졌지만 이미 그런 것이 보편화된 지금은 되려 전통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듯하달까. 글로벌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이런 경향은 짙어지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우리 것 밖에 없으니까.


이런 거창한 생각 때문에 한옥에서 살고 싶은 건 아니다.

실은 한옥에서 에어비앤비 하면 외국인들이 많이 올 것 같아서..........


나야 뭐 돈만 없다 뿐이지 포기할 차도 없고 학군에 연연할 필요도 없으니 로망 실현에 최적화(?)된 인생인 셈.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네이버 부동산 한옥 매물과 전세를 폭풍 검색하며 군침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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