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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_밤에도 집을 구경해보세요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집 구경하고 밤 단풍도 구경하세요


13_밤에도 집을 구경해보세요


여성 1인 가구들이 집을 고를 때 가장 고민되는 건 아마 안전 문제일 것이다.


비용이나 교통 같은 어쩔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안전이 후순위로 밀릴 때면

‘내가 돈 때문에 내 안전을 파는구나’하는 슬픈 생각이 든다.

그래도 비슷한 선택지가 있다면 그중에서는 조금 더 밝고 안전해 보이는 집을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내 경우, 안전성을 판단할 때 의외로 도움이 됐던 게 바로 밤에 혼자서 집을 찾아가 보는 것이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따로 시간을 내 밤에 집을 찾아가 본다는 게 결코 쉽지 않고 생각보다 많은 참고가 된다.


16번째 집이 될 뻔한 곳이 있었다. 지금 사는 곳에서 큰길로 나와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집이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부엌에 방 하나인 분리형 원룸(편의상 1번 집이라 한다)이고, 그 집은 그래도 방이 두 개 있고 내부도 연회색의 신식 장판(?)과 흰색 하이그로시(?) 싱크대가 있는 멀끔한 집(여긴 2번 집)이었다.


워낙 예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옛날 사람인 나는, 70년대 주방 찬장 에나쓰였을 법한 고색창연한 나무 창틀에 잔잔한 빗살무늬의 간유리가 끼워진 1번 집에 쓸데없이 정이 갔다. 게다가 주변에 나무가 많은 점도 끌리는 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2번 집의 매끄러움 역시 쉽게 잊을 수 없었다. 특히 방이 두 개라는 점에 구미가 당겼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놀러 올 때 침대를 드러내는 게 항상 싫었기 때문이다. 손님들도 방이 두 개면 편하게 자고 갈 수 있을 텐데. 지긋지긋한 원룸 생활을 청산하고 한 단계 도약하려면 무조건 2번 집이어야 했다.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밤에 차를 한 잔 하게 됐다. 두 집 모두 찻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친구의 조언을 받을 겸 함께 가보자고 청했다.


먼저 가 본 곳은 2번 집이었다.

중개인과 낮에 가봤을 때에는 바로 앞에 아파트와 초등학교가 있어 동네 분위기가 나쁘진 않아 보였다. 그런데 밤에 가보니 완전히 딴판이었다. 특히 근처 지하철역에서 올라가는 길이 너무 좁고 으슥했다. 집으로 가기 전, 가파른 계단까지 있었는데 가로등 불빛이 충분치 않아서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걸어야 할 정도였다.


집 앞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1층의 필로티 구조가 문제였다. 보통은 센서 등을 설치해 불이 켜지도록해두는데, 거긴 그런 게 없었다. 퇴근하고 돌아올 때마다이 길을 혼자서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하이그로시니 신식 장판이니 하는 것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이번에는 1번 집을 향했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작은 동네 도로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되는 곳이었다. 인적이 드물고 어둡기는 했지만 으슥하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다.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는데, 순식간에 아주 시원하게 해결돼 버렸다.


자신이 사는 집의 안전성이 미비하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보완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솔직히 안전성 강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심리적으론 나름 효과가 있다.

‘나는 나를 보호할 수 있다’는일종의 자기 최면 같은 거다.


전에 딱 한번, 작은 삼촌이 이사를 도와주신 적이 있다. 시계 걸 못도 박고, 싱크대 선반도 달고 전등도 바꾼 다음, 삼촌은 동네 철물점에서 현관 문고리를 사다 바꿔주셨다. 비록 비밀번호를 찍고 들어가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비밀번호 패드 말고 열쇠를 이용하는 집이라면, 이 방법도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요새도 자기 필요할 때 문을 따고(?) 들어오는 집주인들이 있다고 하니. 나도 전에 집수리 문제로 집을 찾아오기로 한 건물 전담 수리 아저씨가 내 집 앞에서 나한테 연락하는 대신 열쇠 꾸러미를 달그락거리며 우리 집 열쇠를 찾는 모습을 발견하고 기함을 한 적이 있다.


이 외에도 창문에 손쉽게 달 수 있는 보안 장치 같은 게 있다. 대형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다. 창문과 창문 사이의 이음매에 붙여두면 창문이 열릴 때 경고음을 내는 장치나 창틀에 끼워 창문이 잘 열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것들.


전에 <자존감 수업>을읽다가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다. 자존감에는 세 가지 기본 축이 있는데, 그 세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안전감이라는 사실이다. 자기 안전감은 자존감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한 안전감은 주로 트라우마나 애정결핍 등을 느끼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심리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먹고 자는 장소에서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느낀다면 이 역시 자존감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 글을 읽고 그날로 마트에 가서 각종 보안 장치를 사 왔던 기억이 난다. 퀄리티가 의심스러운 장난감 같은 제품들뿐이었지만 여기저기에 달아놓고 나니 확실히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주인과 협상해서 방범창을 달아볼까’, ‘세콤 이런 건 얼마나 하려나’이런 고민도 해보는 중이다. 그러면서 새삼 알게 됐다. 나는 나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거.

‘1인 가구력(力)’이 또 한 번 레벨업 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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