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_대출 포비아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대출, 그 것은 한 편의 느와르...............


14_대출 포비아


갑자기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월급이 한 달 밀리게 된 주인공.

시시각각 다가오는 대출 상환일 때문에 그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자존심을 버리고 친구, 동료, 일가친척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들도 우리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돈이 없다.

속수무책으로 대출일을 넘겨버린 다음날,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건조한 목소리의 은행원이 “당신은 오늘부터 신용불량자입니다”라며 “오늘부터 통장거래와 카드 사용이 금지됩니다”라고 통보한다.


‘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터덜터덜 걸어(카드가 막혀 버스를 못 탄다) 집에 와보니 용 문신을 한 깡패들이 드러누워있다.


‘응? 난 분명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하지만 그들은 분명 이렇게 말한다.

“돈을 빌려갔으면 갚아야지 이 사람아. 우리는 뭐 땅 파서 장사해? 어?”


궁지에 몰린 주인공은 깡패들이 잠깐 해장국을 먹으러 간 사이에 황급히 야반도주를 한다. 내딛는 걸음걸음 뜨거운 눈물을 뿌리면서…


과장이 좀 보태지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빚은 대략 이런 이미지였다. 스스로를 ‘대출 포비아’라고 불렀을 정도로 빚은 내게 생소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빚 다음에 통상 오는 단어들도 너무 무섭지 않나? 빚쟁이, 빚 독촉, 빚더미…. 끼리끼리 논다고, 내 주변엔 나 같은 대출 포비아가 한 둘이 아니다. 다달이 나가는 월세 걱정을 하면서도 전세자금을 대출받으라고 하면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 진다.


“그러다 큰일 나면...”

“무슨 큰일?”

“… 큰.. 일”


순전히 추측이지만 나는 나와 내 또래가 겪고 있는 대출 포비아의 근원, 그게 IMF와 맞닿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외환위기 당시 나는 열 살이었다. 혹시 아는지. 열 살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하는 나이라는 걸.


TV만 켜면 무서운 음악과 함께 한강 다리를 배경으로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거액의 빚이나 대출, 파산이나 도산 같은 단어가 멈추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는 어려워서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어린이가 빚에 대한 경미한 트라우마를 갖기엔 충분하지 않나?


물론, 그 정도의 옅은 트라우마는 현실의 팍팍함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어느새 수천 만원의 전세자금 대출을 두 번이나 받아보고, 엄마를 대리해 주택담보대출을 진행했으며 막상 이사할 돈이 없어 마이너스통장까지 뚫은 프로 대출러가 됐다. 이제는‘가계빚 사상 첫 1,400조 원 육박’ 이런 제목의 기사를 보면

‘음, 나 혼자만은 아니로군’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막연하게 빚이 두려워 빨리 전세로 갈아타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적은 월급으로 돈을 모으려면 결국엔 지출을 줄이는 길 뿐이다. 한 달에 수십만 원 하는 월세를 부담하면서는 목돈을 모을 수가 없다. 나는 월급을 받기 시작하고 나서도 3년 가까이를 월셋집에서 살았다. 당시 월 35만 원으로 다른 곳에 비해서는 싼 곳이지만, 부담은 부담이었다. 월 35만 원이면 1년에 420만 원, 3년이면 1,260만 원이다. 그 돈이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다. 지금은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그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살면서 월 대출이자로 11만 원 정도가 나간다. 전세자금 대출은 원금을 굳이 갚을 필요 없이, 이자만 내다가 전세계약이 끝날 때 그냥 소멸시킬 수도 있고, 원한다면 저금하는 셈 치고 중간중간 원금을 갚을 수도 있다.


자금이 부족해 전세로 가기가 어렵다면 보증금이라도 높여 월세를 줄이기를 권하고 싶다. 빚을 남용하는 건 당연히 안되지만 빚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방법도 알아야 지금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 혹시 단지 돈을 빌리는 게 거부감이 들고 무서워서라면, 1년에 들어가는 월세와 대출 금리(대출금리 계산기를 검색해서 원금과 기간, 이자 등을 입력하면 된다. 금리는 최근 나온 주담대 기사를 검색해서 적어 넣는다. 신용에 따라 금리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대략적인 수준은 파악할 수 있음)를 비교해보기 바란다. 눈으로 숫자를 확인하면 두려움이 조금은 누그러질 수도 있으니까.


전세자금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전체 보증금의 30%는 있어야 한다. 대출이 전세금의 70%까지만 되기 때문이다. 전세자금 대출도 어느 정도는 돈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변에는 이 30%가 없어 전세로 옮기지 못하고 장기 월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돈이 더 없는데도 더 비싼 돈을 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돈이 더 많으면 저렴한 집에 살면서 더 빨리 돈을 모은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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