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 동네 슈퍼는 대부분 가겟집이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물건을 진열한 작은 슈퍼 공간이 나오고 미닫이를 하나 더 열면 방이 나오는 그런 구조.
이런덴 계산대랄 게 따로 없다. 손님이 들어오면 주인이 방에 앉은 채로 맞이한다.
계산을 하려고 돈을 내밀면 주인은 여전히 방에 앉은 채로 방 모서리에 있는 현금통에서 잔돈을 거슬러준다.
겨울엔 이불을 덮고 있다.
마찬가지로 손님이 와도 이불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다.
물론 집이 따로 있고 가게에 나와있는 동안만 방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집과 가게 두 개를 모두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이 이런 가겟집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런 가겟집을 보기 어려워진 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런데 요 몇 년 새 ‘신흥 가겟집’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러 광주에 갔을 때다. 한 유흥가에서 그를 만나기로 하고 장소를 검색하는데 예쁜 와인바가 있었다. 매장은 좁았지만 인테리어와 안주가 훌륭해 보였다. 술을 마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마땅히 갈 데도 없어 와인바로 직행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었다. 돌아서려고 했는데 문 안쪽에서 흐릿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하고 문을 밀었는데 의외의 풍경을 발견했다.
가게 바닥에 스태프로 보이는 청년 두세 명 자고 있었던 것이다.
12월이라 날씨가 추웠는데. 그들은 바닥에 은박 돗자리를 깔고 선풍기처럼 생긴 난방 기구를 틀고 자고 있었다. 놀라서 문을 얼른 닫았다.
‘그냥 갑자기 피곤해서 잠깐 쉬는 거였을까. 아니면 여기서 사는 걸까. 젊은 사람들이 보증금을 털어 가게에 투자하고 매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청춘 드라마?’하고 머릿속에서 각종 스토리들이 빠르게 전개됐다.
그날 와인바를 선택한 것은 와인 한 병을 내가 들고 갔기 때문이었다. 지인은 “이런 가게에 와인 들고 가는 건 실례”라며 다른 곳에 가서 맥주나 마시자고 했다.
이보다 몇 년 전에는 한 독립서점 주인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세련된 디자인 책자이며 독립 잡지가 센스 있게 놓여있는 공간은 젊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아름다웠다.
주인장은 “그냥 서점인 줄 알고 들어오시는 어르신들도 있어요. 한 번은 어떤 노부부가 매장을 한 번 둘러보더니 안쓰러운 눈빛으로 ‘고생이 많다고’하시더라고요.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보이니까.”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나는 그때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나중에 야서 점에 들어서자마자 놓여있던 싱크대와 식탁, 책장들 사이에 있던 손잡이 달린 널찍한 판자가 기억났다. 그 손잡이 달린 판자는 일종의 접이식 침대였다. 그들은 거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궁색하고, 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런 그들이 조금 부러웠다.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아는 사람들이니까. 또 용감하게 하고 싶은 일은 선택한 사람들이니까.
그들도 때로는 치사하고 착잡한 일들이 많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0대에도 여전히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선 그냥, 그저, 마냥 부러웠다.
신흥 가겟집들, 조용히 응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