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가 어쨌든
늘 비어있던 편지함에 낯선 편지 두 통이 꽂혀 있었다. 하나는 제주시청 주타차단속팀 또 하나는 전북지방경찰청에서 온 편지였다. 머리속으로 오만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보이스 피싱에 이은 최신 사기 수법이 편지 피싱인가? 누가 내 명의를 도용해 범죄를 저질렀나? 전북이라니 전북에 내가 언제 갔더라? 심장이 콩닥대고 손이 떨렸다. 역시 나는 죄짓고는 못살 인간이다. 이토록 작은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별 일 아닐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제주도에서 온 것은 주차 위반, 전북에서 온 것은 속도 위반 딱지였다. 그렇다. 나는 죄 짓고 못살 인간은 커녕 이미 죄인이었던 것이다...
제주도 주차위반 장소를 보니 공항이었다. 할머니랑 엄마, 이모를 기다린다고 공항 입구에 차를 잠시 세워 놨는데, 알고 보니 공항엔 1분 1초도 차를 세울 수 없었다. 무조건 주차장에다 주차해야 하는데, 초보인 나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기억을 되짚어보니 내 앞에 버젓이 주차 위반 전광판을 단 단속 차량이 서 있었다. 위협적으로 번쩍이는 그 전광판을 보고도 거기 차를 세웠으니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니었을까. 과태료 금액은 4만 원이었다.
이번엔 전북에서 온 고지서를 살펴봤다. 제주도 여행 후 친구와 고창 여행을 갔는데, 그때 떼인 딱지였다. 속도 제한 구역이 굉장히 많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나는 속도를 줄인다고 줄였는데 내 주변 차들은 내 차를 추월해 쭉쭉 달려나갔다. 뭐지? 하며 갸웃거리다가 나 역시 과속을 하고 말았다. 속도위반 과태료는 7만 원이었다. 참으로 웃긴 일이다. 공항에선 '눈치도 없이' 아무도 차 안세우는데다 차를 세워서 딱지를 떼이고, 고창에서는 의미없이 다른 차들 '눈치만 보다가' 속도를 위반하다니. 눈치보지 말고 살든가, 눈치 껏 살든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란 말이다 집순아!
다시는 받을 일이 없으리라 다짐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과태료 고지서를 꼼꼼히 읽어봤다. 속도 위반 고지서를 자세히 보는데 옵션(?)이 있다! 과태료로 납부하면 금액은 7만 원이고, 범칙금으로 내면 6만 원으로 1만 원이 싸다. 대신 범칙금을 선택할 경우 벌점이 올라간다. 벌점이 쌓이면 면허 정지나 취소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1만 원을 더 내는 과태료 쪽을 선택했다. 죄 지어 놓고 돈으로 형벌을 깎은, 조금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다. 하... 이렇게 소소한 인간이 속도 위반이라니... 속도 위반이라니!
참고로 과태료는 무인카메라로 단속돼 위반한 운전자가 누구인지 그 자리에서 알 수 없을 때 부과되는 금액을 말한단다. 벌점이 부과되진 않지만 납부기한을 넘길 경우 번호판 압류나 차량 압류 등의 처분을 받을 수 있다. 범칙금은 경찰관이 현장에서 도로교통법 위반을 적발할 경우 발부한다. 이 경우 범칙금과 함께 벌점이 부과될 수 있다. 물론 이럴땐 돈 주고도 벌점을 깎을(?) 수 없다.
주변에 도로 위에서 벌인 나의 무법 행위를 털어놨다. 늘상 내게 불심(佛心)이 있다며 나의 평정심을 높이 사던 선배가 나더러 도로의 무법자에 스피드 광이랜다. 어디 급히 갈데도 없는 여행길에서 난 뭘 그리 서둘렀는지. 남들이 빨리 간다고 나까지 빨리 갈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