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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 Jun 28. 2020

[어드밴스드_09] 역주행

굴러가 어쨌든


'경찰차의 추격을 받다'에 이은 제주도 여행기 2편. 여행 전에 내가 시전한 거나한 푸닥거리 덕분인지, 제주도에서의 일정은 물 흐르듯 순조롭게 흘러갔다. 처음으로 전기차를 타봤는데 내부 공간이 넓고 승차감도 나무랄 데 없었다. 제주 곳곳에 충전소가 있어서 충전 스트레스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조용했고, 무엇보다 연료비가 ‘0원’이었다!


제주도에서의 첫 목적지는 당연히 바다여야 하니까. 할머니와 이모, 엄마, 나까지 네 사람은 뭉치자마자 월정리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비취빛 바다 색에 감탄하며 우리 네 모녀는 모래사장을 걷고 또 걸었다. 애들처럼 나무막대로 모래사장에 하트를 그리기도 하고 점프샷을 찍다가 포복절도하면서 바다 내음을 충분히 들이켰다. 여행의 마무리는 항상, 숙소에 달린 야외 자쿠지에서 즐기는 사우나였다. 엄마와 이모는 막걸리를,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얘기를 나눴고 할머니도 다리로 물을 참방이며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셨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여행 마지막 날에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사려니숲길을 가던 길이었다. 비가 너무 거세져 아무래도 계획했던 숲길 산책을 못할 것 같았다.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하는데 이모가 ‘제주 4∙3 평화공원’ 표지판을 발견했다.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고 하셔서 그쪽으로 차를 돌렸다. 비가 내린 덕분에, 직접 운전을 해서 간 덕분에 그냥 지나칠뻔 했던 의미있는 장소를 여행하게 된 것이다. 평화공원을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도로 옆으로 숲길이 펼쳐졌다. 봄비 내리는 숲길을 보며 우리는 모두 말이 없어졌다. 각자 차창 밖을 응시하며 자신만의 생각에 깊이 빠진 듯 했다. '가족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떠나 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할머니나 엄마, 이모, 딸이 아니라 그냥 각자로서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게 참 좋았다. 이걸로 나는 운전을 배운 보람을 모두 되돌려 받았다고 생각한다.


"다음번엔 부산에 가자!" 우리는 언제일지 모를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제주공항에서 헤어졌다. 여행 전에 일어난 그 일련의 사건들은 역시 액땜이었던 거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가족여행이었다. 아, 한가지 사소한 에피소드가 있긴했다. 뭐, 글로 소개하기도 너무 별거 아닌 일이라 잊을 뻔했는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음식은 맛있고 배는 부르고 날씨도 좋았다. 기분 좋게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다. 그닥 넓지는 않지만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달려 나가는데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순아, 근데 여기 일방통행이야?”

“음… 아니? 왜?”


“그럼 너 지금… 역주행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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