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에서
“나 잘린 거야. 조금만 쉬고 다른 일자리 알아봐야지.” 커피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일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속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코로나로 인한 인력 감축이라고 했다. 매번 뉴스와 신문에서 보던 이야기인데, 막상 실제로 듣게 되니 가슴이 갑갑했다. 당장의 퇴직금과 지원금은 받아서 자신은 돈이 많다며 밥을 사겠다고 했다. 취준생인 나보다 자신이 여유가 더 있어 괜찮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순간, 목 끝까지 구역질이 올라왔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내 오랜 친구였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착한 사람이었다. 공부에 큰 흥미는 없었지만 12년 내내 개근상을 받을 정도로 성실했다. 하지만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단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다. 패밀리 레스토랑, 옷가게, 백화점, 빵가게. 5년 동안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해왔다. 그녀의 부모님도 그러했고, 언니도 그러했다. 대학보다는 당장의 가세에 보탬이 되는 것이 더 시급했다. 그녀는 항상 내가 부럽다고 했다.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다니는 내가 멋지다며 추켜세워주곤 했다. 그러면서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자신은 공부를 못해서 이런 데서 일하는 거라 참을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라는 말을 했다. 마지막은 항상 내가 고등학교 때 조금만 더 열심히 했다면 달라졌을까?라고 말끝을 흐리곤 했다.
불평등은 가시화돼 있지 않다. 그래서 나 같은 청년들에게는 계층이동의 환상이 있다. 마지막 사다리인 4년제 대학을 졸업해 좋은 직장에 가면 나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더 열심히 하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사다리가 없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편승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사다리가 끊기는 것에 불안해한다. 나도 그러했다. 최근 벌어진 인국공 사태에 분노한 이유는 좋은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조민 사태에 분노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있고 그것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나의 불안감은 그것들을 내 노력으로도 이루지 못할 수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청년들에게는 희망과 상상력조차 없다. 애초에 누구도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별을 따기 위한 방법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저 시험 사회에서 도태됐으니 그 자리에서 그 처우를 받는 게 맞다,라고 스스로 학습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같은 집단 안에서 내부만 표류하며 살아간다.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 역시 부재한다. 패배의식으로 점철된 현실의 한계가 상상력까지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가 그러했고, 친구의 친구가 그러했다.
친구는 나의 추천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 다니던 학원에서 영어를 배운 것이 재밌었다고 했다. 일하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느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영어학원을 등록하는 것 대신에, 시급 2만 원짜리 피팅모델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한 곳에서 연락이 와서 다음 주에 면접을 간다고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