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에서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는 직장 문을 박차고 나왔다. 세 번째 승진 시험에서 탈락했을 때였다. 엄마는 수험생인 나보다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책상을 내게 양보하고서 흐릿한 주방 빛에 기대 공부하곤 했다. 시험을 망친 나와 다투던 날, 엄마도 떨어졌으면서 나한테 왜 그러느냐는 모진 말을 듣고서도 엄마는 묵묵히 두꺼운 프린트물을 읽었다. 그런 엄마의 울먹거림을 들은 건 우연이었다. 방음이 잘 안 되던 낡은 아파트 덕분에 새벽에 엄마 아빠의 대화 소리에 깬 것이다. 세 번째라고 했다. 정년퇴직이 10년은 남았지만 더는 버틸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는 30년 넘게 일하던 직장을 스스로 떠났다.
퇴직한 후에도 엄마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퇴근 후에 읽던 조간신문을 아침에 갓 내린 커피와 함께 읽는 것, 전날 마신 술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나를 깨우는 것 정도였다. 대학생이 된 나는 엄마의 일상에 관심이 없었다. 새로 잡힌 미팅과 술자리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무심한 딸은 왜 엄마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지, 왜 꾸준히 뭘 배우러 다니는지, 왜 내게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묻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는 사람이었다. 태생적으로 성향 자체가 그러했다. 그래서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규율에 맞춰 성실하고 착실하게 살아왔다. 어떻게 보면 고지식하고 유연성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입사했을 때 인사 조정 오류로 더 낮은 부처에 배치됐을 때도, 같은 연차의 남자 직원에게 승진에서 밀렸을 때도, 연줄이 없어 승진이 또다시 좌절됐을 때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불만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30여 년 삶을 지탱해주던 공직의 궤도에서 벗어났을 때, 홀가분하다는 말을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마의 궤도가 멈춰 마냥 힘들어할까 봐 무서웠다.
기우였다. 엄마는 오히려 진짜 자기 삶을 사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새로운 궤도를 만들고 나름의 규칙으로 돌고 있었다. 못 보던 자전거를 발견한 날, 몇 년째 공석이던 엄마의 메신저 프로필이 자전거를 탄 사진으로 바뀌었다. 벌써 5년째, 엄마는 최소 1주일에 2번은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 문화센터 자전거 모임은 매주 한강 건너로, 춘천으로, 청계산으로, 남이섬으로 간다. 엄마는 이전과는 다르게 의욕적으로 새로운 요리를 해주기도 하고, 집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기도 한다. 여전히 쇼핑을 좋아하지도, 친구 모임에 즐겨 나가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새로운 궤도를 만들어 또 다른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엄마를 보며 때론 이탈에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고, 스스로 만든 궤도에 충실한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다. 정착한 궤도가 없는 게 문제지 이탈은 그다지 큰일이 아닌 것만 같다.
엄마의 궤도는 오늘도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