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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뇨뇨 Nov 17. 2020

막국수

상념의 방



“이모! 여기 막국수 4개랑 제육볶음 그리고 소주 두병!” 평범하디 평범한 수요일 낮. 점심 먹기에 살짝 늦은 1시. 엄마랑 나는 멋쩍게 눈을 마주치곤 서둘러 면발을 입에 욱여넣는다. 우리 동네에는 ‘먹자골목’이 있다. 대부분이 고깃집이거나 술집이지만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이 있어서 가끔 밥을 먹으러 오곤 한다. 엄마랑 오랜만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날이었다. 막국수를 좋아하는 엄마의 눈에 들어온 막국수를 파는 고깃집. 처음 가보는 집이라 맛이 걱정되긴 했지만 한 번 시도해보자, 하는 마음에 들어간 곳이었다.


음식이 나온 지 5분이나 됐을까, ㅇㅇ건설의 로고가 박힌 옷을 입은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또래부터 우리 아빠뻘로 보이는 아저씨까지. 등장과 동시에 음식과 술을 시킨 이들은 어느새 식당 안을 꽉 채웠다. 우리 모녀는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거친 말들을 내뱉는 남자들로 둘러싸이게 됐다. 자연스럽게 엄마와 나 사이의 대화는 사라졌다. 그러자 저마다의 반나절 동안의 고충과 퇴근한 뒤 무엇을 할 건지 자랑하는 목소리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닫고 휴대폰만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권주사도 없이 초록색 병에 담긴 액체를 각각이 삼키곤 했다.


막국수의 맛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맛있다며 먹었는데, 빨리 씹히지 않는 국수가닥이 고무줄처럼 질기게만 느껴졌다. 사실 그리 당황스러울 일은 없었다. 우리에게 그 공사장 인부들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도, 말을 건 것도 아니었다. 식당이 떠나가랴 떠드는 것도 일반적인 직장인 술자리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저 그들이 입은 그 진회색 잠바가, 군데군데 흙이 묻은 바지와 신발이, 해가 중천인데 시키는 소주가, 그리고 조금은 거친 목소리들이 익숙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브랜드 아파트가 있다. 텅 비어있던 내 방 창문 바로 맞은편은 1년도 채 안 돼 어느새 우리 아파트만큼이나 건물이 올라왔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인 듯싶었다. 아파트가 지어지는 건 눈에 보이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이들을 보기란 쉽지 않다. 누가 그곳에서 일하는지 관심이 없을뿐더러 동네 주민 시선에 들어올 일이 없다. 아파트 한 단지를 짓기 위해서 수많은 인력이 투입됐을 것이다. 하지만 공사차량 진입에 반대하는 현수막도 걸리는 마당에 노동자들이 활보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내가 노동자들을 마주한 적이 없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그들이 지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나도, 나와 같은 이들이 살 아파트를 짓고 있는 그들도 모두 똑같이 막국수를 먹었다. 가격이 다르지도, 맛이 다르지도 않다. 하지만 브랜드 아파트에 겨우 전세로 산다는 이유로, 4년제 대학을 나와 육체노동을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그들과 나 사이의 선을 그었던 것이다. 꼭 선은 가시적으로 그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나와 너 사이를 구분 짓기 위한 시도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학벌이, 연고가, 성별이, 또 나이가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조차도 외부와 선긋기를 위해 내부에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왔다.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그제야 식당 안 아저씨들과 비슷한 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먹자골목에서 이 시간에 밥을 먹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 후로 흙 묻은 바지로 동네를 거니는 이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때면 식당에서 먹은 막국수를 떠올린다. 또, 스멀스멀 누군가를 향해 날 선 경계를 세울 때도 막국수를 떠올린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수없이 선이 그어져봤기에. 같잖은 오만과 위선에 스스로가 더 이상 부끄러워지지 않는 날까지, 난 아마 그날의 막국수를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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