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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뇨뇨 Mar 14. 2021

잉여인간

상념의 방






대학교 일학년 이학기 때 전공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학수 번호가 무려 4로 시작했다. 입학한 지 겨우 한 학기밖에 지나지 않은 일학년이 듣기에 무리가 있는 과목이었다. 하지만 좋은 강의 평가를 보곤 신입생의 패기로 덜컥 신청해버렸다. 러시아 문학을 심도 있게 배우는 수업이었다. 매주 한 권씩 책을 읽어야 했지만, 덕분에 다양한 작품을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 번은 러시아 문학 속 정형화된 인간 유형에 대한 리포트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여러 선택지가 있었고, 그중 내가 선택한 주제는 ‘잉여인간’이었다.


잉여인간은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라 불리는 19세기를 대표하는 문학 개념이다. 낭만주의 기조에서 리얼리즘적 성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이전에 없던 독특하고 새로운 인간 유형을 일컫는다. 당시에 발표된 수많은 작품의 남주인공들이 비슷한 모습을 띠면서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당대 러시아의 현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잉여인간이라는 신조어가 흔히 사용되곤 한다. 의미 그대로 '잉여’로운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나 러시아 문학에서의 잉여 인간이란 단순히 ‘잉여’로운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특별한 지적 능력과 비판정신을 소유한 지식인이다. 대부분 주류 귀족 출신이며 농노제의 수해를 받던 집단이다. 하지만 19세기 초 농노제 폐지로 인해 몰락한 귀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러시아 주류에서 소외된 채 살아간다.


당대 러시아 지식인들은 서구적 자유주의를 배우며 러시아 사회의 후진적 전제정치에 불만을 가졌다. 그들은 수십 년간 혁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견고한 러시아의 보수적 전제정치를 이기지 못했다. 혁명의 실패는 많은 지식인들을 무력감에 빠뜨렸고, 그들의 현실 변혁 의지를 좌절시켰다. 이들이 바로 러시아 문학 속 전형적인 잉여인간이다. 소설 속 잉여인간들은 러시아 지식인들이 가진 사회 개혁 의지와 그 한계를 역설한다.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통해 러시아의 후진적 정치상황을 개혁하려고 한다. 날카로운 지적 능력으로 사회 구조의 모순을 비판한다. 하지만 개혁의 실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그들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귀족 사회의 허위 허식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극복할 방안도 찾지 못했다. 무기력과 무위, 권태와 우울, 냉담과 회의에 빠져 괴로워하는 방관자의 입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이유다. 지성과 능력은 갖추었으나 시대가 그들의 생각과 사상을 받아들여주지 않자, 그들의 열정은 식어버리고 주위에도 냉담해져 결국 자기 중심주의와 권태에 빠져버렸다.


잉여 인간은 19세기 러시아의 부정적 산물이자 당시 지식인들이 지닌 고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간 유형이다. 잉여인간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무력함에 ‘잉여’로워져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과는 다르게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잉여’물이 되어버린 인간의 무능력함을 비판하고, 또 그들의 모습을 통해 당대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






잉여인간은 19세기 러시아의 무기력한 지식인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학 인물 유형이지만, 현대 한국 사회의 청년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자본주의 사회 속 인간은 기계처럼 생산을 강요받는다. 기계는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질수록 가치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지는 일이 중요해진다. 투입한 시간과 비용 대비 더 많은 결과물을 생산해내야 한다는 의미다. 이때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그래서 한정된 시간 동안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인간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는 생산 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우리네들이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공백기를 두려워하는 일은 이러한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을 어려서부터 학습한다. 그러지 못했을 때는 내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마냥 불안해진다. 촘촘한 격차로 이루어진 사회는 경쟁에 불을 붙인다. 끊임없이 자신의 생산성에 대해 의심하고, 타인과 비교하고, 자괴감에 빠진다.


나는 태생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되레 비생산적인 행위를 좋아한다. 가령 무언가에 대해 깊게 고민을 한다거나,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일 따위들 말이다. 이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생산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는 내게 더 높은 스펙,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가시적 결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가시적인 생산물은 크게 의미가 없다.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인들과 결이 조금 다르지만 나 스스로도 현재 한국사회의 잉여인간인 것만 같았다.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면서도 개혁 의지를 상실한 채 그 안에서 표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평등으로 점철된 사회가, 점점 벌어지는 상위 20%와 80%의 격차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20%의 궤도에 오르고 싶어 발버둥 쳤다. 이런 내 꼴이 잉여인간들 마냥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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