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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뇨뇨 Mar 27. 2021

스탯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있다. 바로 "스탯"이다. 게임을 자주 하는 이들이라면 익숙할 단어일 테다. 흔히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키울 때 "스탯을 쌓는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캐릭터의 상태와 관련된 수치나 통계화 가능한 기록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통계라는 뜻을 가진 statistics의 약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다. 게임을 못하는 편이기도 하고 가상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하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내가 최근 스탯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이유는 내 인생이 게임 캐릭터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 캐릭터를 키우기 위해 유저들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승률을 높이기 위해 돈을 들여 전투 물품을 업그레이드하고, 시간을 투자해 사냥 시간을 늘린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과정이 쌓이면 결국 레벨업을 하며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게 된다. 내 인생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서류-필기-실무-면접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서류부터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이렇게 떨어진다고? 싶을 정도였다. 비슷한 스펙의 사람들은 나만큼 안 떨어지는 것 같은데,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자괴감이 들었다. 여기저기 조언을 구하고 자소서를 수십 번도 더 고치고 나니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필기 전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어느 정도 공부량이 쌓여 있었어서 필기의 벽을 금방 뚫을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실무 전형과 최종 면접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취업하기 힘든 걸까. 세상 탓도 많이 했다. 3차, 4차 심지어 5차까지 있는 언론사 채용 전형에 질려만 갔다. 고차로 올라갈수록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 부족함이 너무 많이 보여서 위축되기도 했다. 실무 면접에서 3번, 그리고 최종 면접에서 3번째 떨어졌을 때, 맞지 않는 직업을 내가 붙잡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메이저 매체도 있었지만 중대형 매체가 더 많았다. 이런 곳에도 떨어지는데 내가 원하는 메이저 언론사에 들어갈 수 있을까, 자존감만 자꾸 떨어졌다.







자소서와 필기는 내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많이 고치고, 공부하면 된다는 방향이 보이는 분야였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하니 처음에 탈락을 반복하던 내게 합격의 길이 보였다. 하지만 실무 전형과 최종 면접은 적성 검사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더 강했다. 정말 기자라는 직업을 할 수 있는,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판명하는 과정. 그런데 이 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나니 내가 적합한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그 일을 하고 싶어도 그 일과 내가 맞지 않으면 과연 들어가서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은 항상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많은 노력을 통해서 얻어낸 것이 대부분이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일도 없었고, 쉬운 부분도 없었다. 남들 앞에서는 원래 잘하는 척하고 싶어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뒤에서 혼자 많이 노력했었다. 백조들이 물아래에서 힘차게 다리를 휘젓고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딱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는 이런 내가 싫었다. 처음부터 타고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부터 쉽게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면, 능력을 갖고 있으면 좋았을 텐데. 발버둥 치며 애쓰는 내 모습이 싫었다. 이런 모습을 들키기 싫은 괜한 자존심에 처음부터 잘하는 척, 노력하지 않는 척하는 내 모습도 우스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게 모든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되레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그것이 소중한지를 알 수 있었고, 또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더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나 역시도 많은 노력을 했던 만큼 더 폭넓게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됐기도 했다.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일이나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예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겪어왔고 또 지금 거치고 있는 과정 자체가 스탯을 쌓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게임 캐릭터가 레벨업을 위해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는 일. 최종 레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가듯이 단계별로 성장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 한 번에 성공할 수는 없다. 레벨 10밖에 안되는 캐릭터가 보스몹을 처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능력이 덜 쌓인 내가 덜컥 회사에 최종합격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분명 일하면서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테다. 또한 그 일의 소중함을 크게 느끼지도 못했을 테다. 본래 인간이란 간사해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다가도 막상 손 안에 넣고 나면 그 소중함을 잊기 마련이다.



탈락을 실패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생각의 전환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더 좋은 회사로 가기 위한 스탯을 쌓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지금 이렇게 스탯을 쌓아가고 나면 결국엔 원하는 회사에 들어갈만한 능력을 갖게 되겠다는 확신도 생겼다. 그래서 무언가 실패를 겪는 주변인들에게 우리의 실패가 성공으로 향하는 스탯 쌓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위안이자 그들에게 하는 위로이다. 그리고 동시에 힘든 시기를 버텨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을 다 포기하려던 순간에 빛을 본 브레이브 걸스를 보며 이 말이 참 와 닿았다. 이들이 유명해지기 전에 흙먼지가 날리는 군부대에서 웃으면서 열심히 춤추지 않았더라면, 또 평소에 연습을 열심히 해두지 않았더라면 아마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쳤을 테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니 결국 좋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걸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 시간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언젠가, 곧 찾아올 해 뜰 날을 위해 스탯 쌓기를 열심히 해야겠다. 포텐을 터트리기 위해서는 스탯을 쌓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결국 빛을 보는 날이 올 테다. 이 글을 보는 이름 모를 당신에게도 그러한 행운이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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