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토목세틴 3일 차, 그리고 이별 4일 차

ADHD약 효과와 부작용 관찰기

by 해센스

아토목세틴과 항우울제 3일 차이다. 그젯밤에는 항우울제를 스킵했다. 일부러 안 먹은 것이 아니라 어제 저녁에 약 먹으려고 하는데 테이블에 알약이 있었다. 전날 빠져나와서 못 먹은 것이다. 누락을 하다 하다 못해 약도 빠뜨리고 먹다니 ADHD가 맞긴 한가보다. 인생에서 뭔가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 딱 그런 느낌을 대변한다. 약 두 알을 먹으면 되는데 그중에 한 개는 빠뜨리고 나머지 한 개만 먹는다든지 하는 그런 느낌.


그런데 안 먹었어도 어제는 우울하지 않았아서 괜찮았다. 회사에서는 회사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점심도 먹고 이야기도 조금 나눌 수 있고 우연히 친구들이 연락을 해줘서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니 그렇게까지 혼자만의 빈틈이 없어서 괜찮았다.


신기하게도 퇴근하고 나서 냉장고에 있던 음식을 먹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까지 했다. 빨래는 보통 미루는데 제때 해서 이것이 약효인가 싶었다. 어떤 과업에 하나에만 쭉 집중을 유지하는 능력은 큰 차이를 못 느끼겠다. 여전히 산만하고 지루한 것은 견디기 힘들다. 그런데 하기 싫은 일을 덜 미루고 해내는 것에는 체감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집안일도, 회사일도 그렇게 급하지도 않은데도 평소에 비하면 착착이었다.


가장 체감하는 약효는 시간을 보고 아침에 벌떡 일어난다는 것이다. ADHD로 살아오면서 제일 힘든 것이 시계를 보고 뭔가를 준비해야 할 시간에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안다. 알람도 맞춰놨고 눈도 떴다. 그런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 엄청 시끄러운 알람시계를 썼고, 못 일어나면 엄마가 최종적으로 깨워줬다. 지각은 셀 수 없이 했다. 공부 잘하는 것 치고는 지각은 너무 많이 했다. 대학교 때도 학교가 1시간 정도 걸리는데도 조금을 늦게 나가 역에서 택시를 타기가 일쑤였다. 그 5분 10분, 그게 나한텐 늘 어려웠다. 그런데 '어, 지금 준비해야 되네. ' 하고 침대에서 벌떡 나간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이 시기에 가장 효과를 가장 보고 있다고 느끼는 점은 감정이 별로 없어진 것이다. 유튜브에서 아토목세틴 계열 약의 특징으로 어떤 분이 "emotional blunting(감정이 무뎌지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기쁘지도 않고 그렇게 슬프지도 않고 무뎌지는 것이다. 항우울제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감정이 무뎌지니까 그렇게 우울해지거나 감상에 오래 젖지 않는다. 감상에 젖으려고 하다가도 이내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원래 나는 한편으로 굉장히 이성적이고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는데, 감성적일 때 그 감성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을 어쩌면 꽤나 즐겼다. 그 부작용으로는 짧은 시간에 타인은 이해하기 힘든 정도의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약을 먹으니 감성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고 재빨리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별하고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렇게 슬프지도 않지만, 전이었다면 애틋한 감정, 그리움, 아쉬움, 내가 느꼈던 가장 좋은 느낌을 어떻게든 꽉꽉 짜내 최대치의 강렬한 감정을 억지로라도 느껴서 눈물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게 보통 내가 감정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이성적이다.


최근의 사람과 이별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니, 앞으로의 만남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는 급하게 만나지 말아야겠다, 여러 사람을 아주 천천히 알아가야겠다, 나에게 급하게 가까워지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서 이성적인 감정이 없는 사람과의 관계가 이상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이성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이별의 아픔과 허전함 때문에 잠시나마 비이성적으로 생각할 법도 한데 내가 너무 이성적이라 적응을 못할 것 같은 정도이다. 연애는커녕 남은 올해 동안 책꽂이에 있는 딱딱한 주식책이나 모조리 읽어버리고 싶을 만큼 이성적이다. ADHD가 아닌 사람들은 보통 이별 후에 이렇게 이성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편 씁쓸하다.


이 약의 가장 힘든 점은 소화시키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약을 복용하면 구토감이 든다. 토할 것 같다. 첫날은 굉장히 심해서 잠들기 힘든 정도였는데 셋째 날이 되니까 조금 적응이 됐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구토감이 나아지는데 약간의 미슥거림은 하루종일 지속된다. 그리고 목에 약이 걸린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콘서타는 정신이 번쩍 깨있는 느낌이 들어서 뇌에 뭔가가 확실히 작용하고 있다, 도파민이 돌아서 에너지가 넘친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약은 사람을 나른하게 한다. 나른한 느낌이 훨씬 좋아서 아토목세틴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속이 안 좋은 것만 빼면. 자폐스펙트럼 사람들은 애초에 불안도와 긴장도가 높기 때문에 메틸페니데이트(콘서타)와 같은 각성제가 안 맞을 수 있다고 한다.


콘서타처럼 입맛을 뚝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약간은 맛에 둔감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콘서타는 음식이 입에 들어오면 너무 역해서 못 먹을 것 같게 만든다면 이 약은 그렇지는 않다. 약간 둔감하게 해서 오히려 더 그렇게 맛있지 않은 것도 잘 먹는 것도 같다. 어제는 간식이 거의 안 당겨서 밥만 먹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배가 고파서 중간중간 먹었다.


어제는 잠이 안 와서 늦게 잤는데 오늘 그렇게 졸리지 않아서 특별히 낮잠을 전혀 자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그전날은 약 먹고 졸린 느낌에 오히려 일찍 잤는데, 어제는 다른 이유 때문에 잠을 못 잤을 수도 있어서 약이 수면에 끼치는 영향은 좀 더 관찰해봐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는 구토감이라는 명시된 부작용 외에 다른 부작용은 체감하고 있지 않고, 감정조절에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만족하고 있다.

keyword
이전 16화ADHD약과 항우울제를 처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