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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색깔 제일 좋아해?

여자가 제일 좋아하는 질문

by 해센스

여름부터 가을까지 잠시 설레고 너무 힘들었는데, 또다시 조금 설렌다. 주변에서 글 쓰지 말란 얘기, 그리고 한 명만 알아가지 말고 동시에 여러 명 알아가란 얘기 들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쓰기는 계속해야겠고, 웃음과 재미를 주는 광대도 계속해야겠다. 웃음거리가 되는 게 나는 즐겁다. 에세이 쓰는 작가는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동시에 여러 명 알아가는 일도 쉽지가 않다. 마음에 꽂히는 사람 있으면 늘 한 번에 한 명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최근에 내게 쉽사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있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와 다시 사람을 조금 믿게 되는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정상적인 대화도 오갔다. 전 글에서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알아가고 있는 외국인 연하남이 있다. 교환학생 시절 제일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유머감각과 말투가 굉장히 비슷해서 엄청 오래 알고 지낸 느낌을 준다.


서로 유머가 잘 통한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자기가 풍자적인(sarcastic) 유머를 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가 많은데, 나한테는 설명할 필요 없이 잘 통해서 좋다고 한다. 나도 비슷하게 느낀다. 영어로도 농담을 꽤 잘하는데, 마찬가지로 내 농담을 잘 받아줘서 좋다.


적당한 텀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주고받는데, 저녁때 내게, 이거 굉장히 돌발적인(random) 질문인 건 아는데, 무슨 색깔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다.


꺄악!! 친한 오빠랑 통화하면서 조금 무겁고 진지한 얘기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육성으로 소리 질렀다.


!!!!!!! 오빠 연하남이 꽃 사주려나 봐요!!!!!!!!!!!


전화 통화를 하는 와중에도 연하남에게 칼답을 보낸다.


"Oh, 나는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좋아해. 너는? 좋아있는 색깔 있어?"


그의 답을 받고 덧붙인다. "그리고 물론 핑크색도 좋아해. "(꽃이라면 핑크가 빠질 수 없지. 그리고 핑크도 실제로 좋아한다 ㅋㅋㅋ)


그의 답변은 또 한 번 감동을 준다.


"핑크랑 노란색이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 "


고맙다고 말하며 속으로 ‘어, 얘 퍼스널 컬러(피부톤이나 얼굴 윤곽, 눈빛, 머리카락 색, 이미지 등에 잘 어울리는 색상) 좀 아네, 센스 있다. ‘라고 생각했다. 다음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핑크랑 노랑이 너의 성격과 잘 어울리고, 너의 친절함을 잘 드러내. 초록색이 아마도 제일 잘 맞고!"라고 한다.


Oh, my god!!!! 이런 스윗한 말은 남자에게 정말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마치 나의 최애 인간군 인프피(INFP), 그리고 감성적인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친한 여자 동생이나 해줄 법한 말을 들었다. 짧지만 그동안 알았던 그는 편안한 연애를 추구하는, 숫자에 강하고 이성적인 무던하고 드라이한 성격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성에 마음이 조금 더 훅 빨려 들어갔다.


내가 너무 감동적인 말이라고 하니까, "물어본 의도는 따로 있었는데 어쨌든 둘 다의 방향으로 잘 먹혔네. "라고 대답한다. 물론 우리는 영어로 대화하고 한국어로 번역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뭐… 예상하는 것이 있긴 하지만, 누나가 모른 척해주지… 그의 카톡 마지막 메시지에 하트만 달아놓고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는 않았다.


드라이한 연애 얘기 한다더니 왜 몽글몽글한 이야기를 하냐며 나가고 싶다면 조금만 더 참아주길 바란다. 드라이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아까 통화를 하던 친한 오빠랑 그냥 베프 사이지만, 그는 메마르고 지루한 현실을 타파해 줄 삼각관계 속의 주인공(가상으로)이 되고 싶어 해서 질투 유머를 종종 던진다.


"너 돈다발 좋아해? 돈다발이 좋아? 꽃다발이 좋아?"라고 물어본다.


나는 "오빠는 말로만 하잖아요. " 하면서, 아직은 꽃다발이 좋다고 한다. 그렇다. 아직은 꽃다발이 좋다. 엄마 나이쯤 되면 돈다발이 좋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꽃다발을 받는 것이 훨씬 좋다. 돈다발을 받을 바에야, ATM 들릴 필요 없이 바로 계좌 이체해서 주식 살 수 있는 현금을 송금받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 이 나이에 선물 받았다고 돈다발을 SNS에 올려봐야 돈보고 남자 만나는지 알고 오해만 받을 것 같다. 언젠가 우리 엄마한테 돈다발 선물해 줄 남자와 진지하게 연애하고 싶긴 하다.


암튼, 이래서 연상은 안된다. 나도 이제 나이가 조금 있어서, 돈다발 얘기부터 나오는 연상 남자는 정말 안된다. 물론 이 정도 유머 있는 오빠라서 베프인 것이지만.


몇 년 새 고백은 몇 번 받았지만, 꽃다발 주면서 고백하는 남자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만남에 꽃다발을 들고 누군가가 나타났던 것이 슬프게도 20대 때이다. 마지막으로 꽃을 받으며 마음을 전달받던 그날, 무려 4년 전 여름에 오늘 들었던 똑같은 질문을 들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내가 평소 좋아하는 자연과 가까운 색깔들인 파란색, 초록색, 갈색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가 진짜 초록초록하고 파랑파랑한 색감이 들어있는 꽃다발을 준비해 왔다. 남자의 이런 작은 정성과 로맨틱함이 좋다. 이런 클리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무슨 색깔 좋아하냐는 질문에 초록, 파랑, 갈색을 말할 정도의 순수함은 이제 없지만, 그래도 이런 질문에 설레는 마음은 아직도 풋풋했던 20대 때에서 조금도 나이 들지 않았다. 한편, 내가 예상한 타이밍에 실제로 꽃을 주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다. 무채색 일상에 색깔을 드리우는 이런 설렘을 주었다는 것 자체가 고맙다.


꽃에 대한 생각, 그리고 꽃을 받는 순간은 언제든 감동이다. 꽃을 받았던 모든 순간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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