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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대충 굽는 남자는 헤어져라

여자가 이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by 해센스

그까짓 고기 대충 굽는 것 때문에 이별을 생각한다고? 제목을 보고 진짜 이렇게 생각했다면 내 얘기다. 내가 했던 생각이고, 내가 들었던 얘기다. 여름에 만났던 신원 확실하고 키 크고 피부도 뽀얗고 괜찮아 보이던 그 남자가 고깃집에서 나의 최애 메뉴인 삼겹살을 대충 굽는 것을 본 순간 진지하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나는 그에게 맞춰줬다. 그리고 기분이 더욱더 안 좋아졌다. 그날 이후 몇 날 며칠 진지하게 이별에 대해 혼자 생각하고 고민했다.


그날 이후 관계가 지속가능성보다는 아름답지 못한 끝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휘감겨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가을의 끝자락에 낙엽이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떨어지는 형상처럼. 나중에 그에게 직접 이야기했다. 고기 굽는 것 보고 고민이 많아졌었다고 고백했다. 그때 들은 이야기이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이별 생각을 하냐고.


나 이전에 연애를 대체로 오래도록 이어갔던 그는 그랬다. 이별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었다. 한편, 나는 이별이라는 단어를 제외한 모든 작은 행동들에 알레르기가 있다. 음… 내가 갑작스럽게 이별과 가까운 단어를 듣게 된다면 작은 알레르기가 아니라 아마 속으로 발작한 다음 심호흡을 일단 크게 하고 다음 행동을 생각해보려고 하겠지만… 연애에서 누가 더 나쁜가 한다면, 고기를 대충 굽는 그보단 이별을 자주 생각하는 내가 더 나쁘다. 인정한다.


어쨌거나 고기를 성의껏 굽지 않는 것은 연애에서 확실히 내가 가진 알레르기 중 하나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잘 보이고 싶어야 할, 호감과 신뢰를 쌓고 싶어야 할 여자 앞에서 고기를 건성건성 굽는 모습을 보면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닌가? 그동안 연애하면서 여자에게 고기를 한 번도 제대로 구워주지 않았던 것인가? 회식하거나 친구들과 고기를 먹었을 때는? 그동안 여자 친구들은 한 번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왜 나한테 성의가 없을까? 분명 그는 나 같은 여자를 만난 것이 너무나 운이 좋다며 결혼까지 생각하고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고기를 성의 있게 굽지 않는 것은 그의 평소 성격일 테지. 평소에 여자에게 이 정도 정성도 쏟지 않는 남자와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나는 그와 평생 함께하면 행복할까?


그렇다.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랑의 다섯가지 언어 중 나의 사랑의 언어의 높은 순위에는 봉사가 자리한다. 나에게 잘 대접해 주는 사람, 사소한 일들을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 일상생활 속에서 아주 쉬운 예시로 풀어서 말하면 둘이 고깃집에 갔을 때 고기를 정성껏 구워주는 남자가 좋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반한다. 이런 남자라면 아주 오래도록 함께해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달력은 고작 서너 장 남짓밖에 넘어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추워졌다며 이불도 두 겹이상 덮어야 하고 옷도 두 세 겹 씩 껴입어야 할 날씨로 바뀌었다. 찬바람 쌩쌩 부는데 왜 갑자기 한여름에 만난 남자가 고기 구웠던 얘기냐고 묻는다면, 숯불에 잘 구워진 삼겹살처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내겐 너무 완벽한, 고기 잘 구워주는 남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돌아 돌아왔다.


찬바람 불기 시작할 때 알게 된 외국인 연하남이 삼겹살을 잘 구울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식당에서 한국어로 주문을 나 대신 해줄지도 몰랐고, 데이트할 때마다 갈 만한 식당 후보들을 네이버에서 몇 군데 찾아서 카카오톡으로 미리 보내줄지도 몰랐다.ㅋㅋ 한국에 온 지 이제 1년 조금 넘었고, 한국어는 고작 얼마 전에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느 한국남자 못지않게, 아니 웬만한 한국남자 이상으로 연애할 때 하면 좋은 모든 것들을 한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하지 않는다.


삼겹살을 굽는데 너무 잘 구워서 놀랐다. “너 너무 완벽하게 굽는데? 한국인 같아. “ 하니까 그런 얘기 많이 듣는다며, 1년 걸렸다고 한다. 여름에 만났던 남자가 고기를 대충 구워서 기분이 안 좋았다는 얘기를 해주니까, “그건 그냥 조금 노력하면 되는 거잖아. ”라고 한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남자친구가 고깃집 사장님이나 경력 쌓인 아르바이트생도 아닌데, 최상의 맛이 나도록 완벽하게 구워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적당한 성의를 보이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외국인 연하남이 내가 세 점 째 먹는 동안 안 먹고 굽고 있는 것을 보니까 조금 미안하면서도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구나, 이런 사람이라면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미 고기가 어느 정도 익었는데도 계속 열심히 끝까지 집게를 놓지 않고 구워서 내 앞에 놔주는 남자를 보고 드디어 결혼할 만한 사람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구나,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전에 카페에서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그가 자기네 나라 뜨려고 돈 열심히 모았는데, 한국에서 MBA 하고 생활하느라 거의 다 썼고, 조만간 취업하면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 젊은데 모은 돈은 없어도 괜찮다. 내가 모은 돈이 조금 있고, 결혼식도 굳이 올릴 생각이 없어서 둘이 살 집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어떤 남자와 결혼까지 생각하려면, 당장 돈은 없어도 되지만 고기는 열심히 굽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고기 대충 굽는 남자와는 헤어지길 잘했다. 어차피 결국 다른, 어쩌면 그 비슷한 결의 이유들이 쌓여 헤어지게 되어있다.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내 친한 친구나 아끼는 언니, 오빠, 동생이라면, 당신을 위해 평소에 사소한 정성을 쏟지 않는 남자는 유심히 살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날들에 당신을 위해 고기를 정성껏 구워서 한점 한점 앞에 올려주는 남자라면 잡아라. 젠틀맨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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