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강이 넘쳐서 요강을 깬다
아는 동생이 어느 날 아침부터 누나 바쁘냐며 연애 상담을 요청해 왔다. 심심하고 지루한데 연애 상담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보니 조금 씁쓸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라면 연애 유목민이던 내가 느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골자는 저번에 잘 돼 간다고 했던 여자와 사귀고 있는데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눈이 휙휙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막상 사귀고 나니까 외모가 그렇게 안 끌리기도 하고, 다른 일로 바빠서 여자친구한테 일주일에 한 번만 보자고 했더니 여친이 삐졌다며 이야기를 해 온다. 상담보다는 그냥 속마음 털어놓고 싶은 모양이다.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고 객관적으로 말해줄 만한 사람이 연애에 대한 글을 쓰는 내가 적격이었나 보다.
이 친구를 만났을 때 들었던 느낌은 ‘연애하면 좀 지루하겠지만 결혼하면 괜찮을 만한 남자네. ’였다. 친구 이상의 느낌은 못 받았지만, 여러 가지로 배울 점도 있고 건실한 친구였다. 이 여자, 저 여자 동시에 만나고 다닐, 눈 깜짝 안 하고 다른 사람한테 거짓말할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
물론 나도 그렇다. 연애만큼은 질리고 질릴 법한데도 결국 머지않아 또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데다가 각기 다른 매력의 남자 3명을 동시에 사귀고 싶다고 남친 면전에 이야기했던 나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여러 명을 동시에 만나거나 한 눈 팔지는 않을 것이다. 중증 ADHD라 만약 몰래 여러 명 만나려고 한다면 누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헷갈려서 다 망쳐버리게 될 것이다.
정말 헷갈려서 동시에 여러 명 만나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쏙 들지 않는 사람을 견딜 만큼 인내심이 크지 않다. 누군가를 만나는데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온다면,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내 취향이 아니거나 애정 결핍을 느껴서다. 그러니까 답은 그 연애를 끝내는 것이지 여러 명을 동시에 만나는 것이 아니다. 한 명을 만나서 그 사람이 마음에 쏙 들기도 어려운데, 여러 명에게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계산해도 확률만 떨어뜨리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동시에 3명 만나고 싶다고 말하던 때의 내 마음은 내 취향의 그가 내 마음을 온전히 가득 채워주지 않아서 느꼈던 결핍감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그도 만나고 아낌없이 표현하는 사랑꾼도 만나고 데이트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돈 많은 남자도 만나고 싶었다. 지금은 연애 외에도 여러 가지를 하는데 그땐 돈 벌고 책 읽고 연애만 했다. 그러니까 시간도 남는데 3명 정도는 거뜬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만약 정말 내 취향이 아닌 사람을 만나고 있고 그에게 매력을 크게 못 느끼고 있는데, 그가 내게 엄청나게 적극적이기까지 한다면, 그때 드는 생각은 '동시에 3명 만나고 싶다'가 아니라 '제발 좀 혼자 있고 싶다'일 것이다. '연애 쉬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 연애 말고 내 인생에 집중하고 싶다'일 것이다.
나는 이제 겨우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는데, 내 관심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에게 카톡으로, 데이트하면서 피곤해서 빨리 집에 들어와서 혼자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하니까 “호강이 넘쳐서 요강을 깬다”라고 한다. 얼마 전에도 나는 마음이 아직 그 정도가 아닌데, 나한테 너무 표현하니까 도망가고 싶어 진다고 하니까 나보고 좋다더니 벌써 질렸냐며 그럴 거면 자기한테 달라고 한다.
사람 마음이 그냥 그렇다. 나는 아직 그 정도가 아닌데, 나한테 너무 들이대면 조금 있던 마음도 쪼그라든다. 어쩔 수 없다. 내가 혼자 푹 빠진 사람한테 페이스 조절 못하다가 망쳐도 봤고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사랑한다고 하는 급발진남들에겐 쾌속 이별 통보도 수차례 해봤다.
이 아는 동생과 나의 공통점은 얼빠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예쁜 여자, 예쁘장한 남자에겐 죽을 못쓰는 우리는 당연히 각자의 연애에서 나르시시스트 만나서 고생도 찐하게 해 봤다. 이목구비 화려하게 생긴 여자, 코끝이 갈라진 이목구비 예쁜 남자라면 지독하게 겪고서도 못 잊어서 끝없이 생각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안주 삼는다. 얼빠는 어쩔 수 없다. 우리의 강점이라면… 외모가 안 끌렸다면 잊는 건 초고속이라는 점이 있으려나. 못 잊는 전남친들은 다 외모가 끌려서 그랬다.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헤어진 지 1년도 더 된 전여친 이야기를 이 친구가 계속해대는 것도 십분 이해한다.
얼빠라도 가슴이 향하는 곳이 그곳이어서 그렇지, 두뇌는 멀쩡하게 잘 작동한다. 이 친구의 표현을 빌자면 맥도날드보단 나물이 맛없어도 건강에는 좋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맥도날드가 당기는 것이 문제이다.누군가에겐 맥도날드여도 자기 눈의 안경이라고, 내 눈에 아직 존잘로 보이지 않으면 나물이다. 우리는 나물처럼 건강에 좋은 사람 만나고 있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전에 즐겨 먹던 맥도날드 생각하는 나쁜 남자, 나쁜 여자였다.
언제든 사람 마음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나중에 네가 더 좋아하게 될 수 있으니까 여자친구에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웬만해선 절대 연애하지 않을 T 쪽으로 한참 치우친 INTJ라서 제발 그 T를 숨기라고 했다. 나한테 말하는 것처럼 솔직하게 했다간 여자는 겉으로는 티 안내도 속으로는 마음 조금씩 접는다고 했다.
맥도날드처럼 생겼는데 나물 같은 연하남도 나쁜 여자가 좋다고 한다. 나물 같아 보였는데 맥도날드 같은 모습이 좋다고 한다. 겉은 착한데 속은 나쁜 여자가 좋단다. 어쩔 수 없다. 나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착한 여자가 오래오래 행복한 것은 동화 속에서밖에 못 봤다. 나물 같았다가 맥도날드 같았다가 해야 상대방을 미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적당히 미쳐야 한 눈을 팔지 않는다. 호강만 넘치게 해 주면 진짜 요강을 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