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끝난 후 밝은 면
아침에 일어났는데 묘한 해방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그동안 느꼈던 불편함과 불안이 사라지고 내가 좋아하는 차분함과 나른함이 감싸는 아침이 찾아온 느낌이었다.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것 같았다. 작년에 무리하게 달리다가 일 년의 1/4 이상을 아프다 보니까 올해 목표는 최대한 아무 변화 없이 하던 것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더 새로운 일을 만들지 말고, 오히려 줄이고, 하던 일만 계속하면 작년보다는 쉽겠지 싶었다. 단거리 경주처럼 한 달에 몇 차례 씩 데드라인이 쉬지 않고 찾아오는 일을 하고, 요일별로 각종 스터디와 독서모임에 나가고, 연애도 사람 바꿔가며 쉬지 않고 하고, 썼던 글을 모아 브런치북도 최대한 많이 발행해 보자며 쉬지 않고 몰아붙였더니 몸만 아픈 게 아니라 마음에도 번아웃이 왔다.
작년에도 회사일이 그전보다 늘고 버겁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올해는 했던 거니까 더 쉽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타의로 업무도 더 가중됐고, 팀구성도, 내 자리도 바뀌었다.
업무 부담이 1분기에 쏠려있다 보니 안 그래도 이 시기에 예민했는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업무까지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심했다. 무엇보다 절차와 방식, 결과가 모두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고 하다고 생각하니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1월 1일에 처음엔 별생각 없이 만났던 사람과 장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빠르고 깊게 진전됐지만 사랑에 빠졌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됐고, 장거리의 벽에 부딪쳐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멀다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가까웠다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올해 목표를 딱 한 개 세우고 공표했는데, 한 사람을 일 년 내내 만나는 것이었다.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 알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지치고 질렸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안 맞거나 힘든 점이 있어도 일단 오래 만나자고 다짐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확신이 있었는데, 확신이나 신뢰가 희미해졌을 때도 일단 진짜로 당장 헤어져야 할 이유가 생기지 않는 한 1년은 꾹 참아보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가 결국 먼저 약속을 깼다.
만남은 둘의 의사가 합치해야 해도, 이별은 한 사람의 의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나보다 자신의 목표를 앞에 두어야 하는 그의 상황을 누구보다 이해하기에 이성적으로도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난 많이 참고 또 참으며 보살 연애를 했어야 했을 것이고, 맞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을 때는 이미 너무 큰 원망과 후회가 쌓였을 것 같다.
막상 혼자가 되어 눈 뜬 아침과 하루가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할 줄이야.
딱 시간 내어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일과 중에 잡담도, 업무적인 내용 외에는 메신저도 거의 하지 않는 나인데, 기다릴 필요도, 답장할 필요도 없는 고요한 카톡창에 마음마저 종일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카톡으로 실시간으로 그의 불안과 조급함을 들어주며, 이 연애를 놓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마음 졸이며 어떻게 하면 최대한 따뜻하고, 마음 편안해지게 답장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찾아서 공유해 줄 필요도, 내가 도움 주고 싶어서 뭔가를 말하면, 됐다며 알아서 하겠다는 그의 답장에 마음 상할 필요도 없는, 그리고 그럴까 봐 그냥 “응ㅠ“, 이나 “ㅠㅠㅠㅠ”라고 답하며 들어주기만 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게 된 일상.
글루텐 몸에 잘 안 맞아서, 빵 좋아하지만 몰아서 일주일에 한두 번만 먹으려고 하는데, 수시로 인스타그램 DM으로 빵과 쿠키 영상 공유해 주는 것에 하트를 달아줄 필요도, 그가 좋아하는, 개가 뭔가를 하거나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해서 누군가가 꽥꽥 소리 지르는 미국식 MEME이 재미도 없고 어디서 웃어야 할지 도통 모르겠는데, 그래도 공감하고 싶어서 몇 번을 돌려보다가 웃겨서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죄책감 가지며 달아줄 필요도 없는 하루.
좋아하니까 꾹꾹 참으며 모든 것들을 공감해 주고, 예민함을 건드리는 지점도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았던 것인데 결국 언젠가 말하게 되면, 내가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못 믿겠다며 확실히 말하라고 몇 번을 다그쳤던 너. 어차피 내가 싫어한다고 말했는데도 눈치 보며 계속할 거면서, 나도 마음 고쳐먹고 진짜 이제 괜찮아서 괜찮다고 하면 나보고 일관성 없다던 너.
결국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이 생기면 내가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논리로 귀결되는 무의미한 언쟁이 필요 없어진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보고 난 이제 정착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끝나니, 친한 오빠에게 난 이제 더 이상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너 좋다는 사람 만나라는데 나의 어떤 면이 좋다는 사람을 만나야 오래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내가 꾸준히 운동하고, 힘들어도 끝까지 몰아붙이는 면이 좋다고 했는데, 나는 사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운동하고, 일이든, 운동이든,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전에 만났던 사람은 차분하고 느긋한 면이 좋다고 했는데, 남자친구가 여사친 만나고 돌아다니면 차분함이나 느긋함은 온데간데 사라진다.
나는 남사친과 연락하고 만나도 되지만, 넌 안된다. 난 너를 위해 거의 늘 시간을 내줄 수 있어서 굳이 나 대신 여사친 만나서 데이트하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
싫다고 했다가 괜찮다고 했다가하는 일관성 없고, 나는 되고 너는 안 되는 이중잣대인 나를 이해해 주고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는 사람 있을까.
연애가 끝나고 가장 밝은 면은 마음속에 생성되었던 여러 문을 다시 하나하나 완전히 개방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
연하, F, 외국인 만나보니, T는 오래 제대로 만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한국 오빠들이 얼마나 연애에 진심이고 진중한 지, 그리고 인내심이 많은지 알게 됐다.
선택지가 많으면 결정은 더 어려워진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