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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Mar 22. 2024

격렬하게 정착하고 싶다

초근거리 라이프스타일의 추구

새로운 시도 끝에 내가 연애와 결혼, 그리고 인생에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 혼란이 와서 정리해 보기로 했다.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있는데 어떤 암을 내가 타협할 수 없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답이 명확해졌다.


격렬하게 정착하고 싶다. 지금 내가 시간을 보내는 장소와 나의 루틴에 너무나도 정착하고 싶다.


시간을 여러 사람에게 펼치기보다 한 사람과 추억과 기억, 대화를 쌓아 나가고 싶어서 너무나도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나의 모든 환경과 루틴이 뒤집어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해서 내 일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일상의 마지막 퍼즐이 되기를 원했다.


몇 년, 또는 한 십 년 후에는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도 또 적응하고 살아가겠지만 당분간은 이제 겨우 찾은 만족과 안정을 유지하고 싶었다.


나는 변화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적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타입인데, 계속 이동과 변화에 자의든, 타의든 적응해야 했다.


10살 때까지 유치원과 학교를 몇 번이나 바꾸면서 계속 다른 도시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 다녔다. 학교나 동네친구들을 사귈만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


이사 갔을 때 좋았던 점은 다녔던 피아노 학원을 더 안 다녀도 되는 것뿐이었다. 사실 그때는 그 한 가지가 너무 좋아서 이사는 정말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방에 갇혀서 복잡한 악보 보면서 동시에 손가락 움직여야 하는 어린아이의 노동, 졸다가 틀리면 바로 옆에서 까탈스러운 피아노학원 선생님이 손등을 툭하고 때리는 감시와 통제가 너무 싫었다.


악보만 보면 너무너무 졸리고 선생님도 무서워서 피아노학원은 안 가고 미술 학원과 글짓기 학원만 가고 싶었는데, 엄마한테 다니기 싫다고 말하면 극단적인 엄마는 피아노 학원만 가기 싫은 것을 이해 못 할 것 같아서 그냥 꾸역꾸역 다녔다.


좀 커서는 잠깐동안 선생님이 집에 와서 피아노를 가르쳐줬는데 그때서야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렸을 때부터 학교나 동네에서 친구를 사귀면 집으로 데리고 와서 놀았다. 친구들 얼굴을 부모님이 거의 다 알 정도로 평일에도, 때로는 주말에도 불러서 놀았다.


완전히 혼자 산지가 4년 차인데 집이 좁아서 사람들을 별로 데리고 올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동네에 집에도 왔다 갔다 하는 거의 가족 같은 친구가 생겼다. 가끔 밤에도 집에서 같이 배달음식 시켜 먹고 가는데, 이 일상과 편안함이 너무 좋다.


서울인데 고도제한이 있어서 비교적 하늘이 뻥 뚫린 이곳이 좋다. 어디든 가기 교통도 편하고, 맛집부터 인프라까지 잘 갖춰줘 있고, 직장인 자취의 성지라 젊은 사람들도 많이 살고, 공통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들까지 접근성 좋은 이곳이 너무 살기가 좋다.


직장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도 2년을 못 넘기고 계속 지역을 옮기다가 드디어 서울에 오고, 독립하기 시작하면서 회사에서도 멀지 않고, 동네도 깔끔해 보이는 이 동네를 선택했고, 폐소공포증 때문에 창 문밖에 바로 다른 건물이 막혀 있지 않는 이 집을 보자마자 골랐다.


이 동네에 어느덧 3년을 넘게 살다 보니까 모든 것이 다 동네와 직장 근처에 있게 되었다. 엄마와 다니던 미용실만 빼고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심지어 우연히 아직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몇 없는 학창 시절 친구도 이쪽으로 이사 와서 정착했다.


10살 때부터 26살까지 살던 동네도 서울이지만 뻥 뚫린 동네라 숨 막히는 느낌은 없었지만, 집에서는 매일 분위기 안 좋고 학교에서는 외롭고 괴로웠던 기억 때문에 그 동네를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었다.


서울의 반대쪽 끝으로 오고 나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힐링받고 영감 받다 보니까 난 여기에 완전히 정착했다. 친구와 지인, 취미 모든 것이 다 여기 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이곳을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가족 빼고는 모든 것이 없어지는 느낌이다.


어릴 때부터 늘 이사 다녔고, 혼자서 해외에서도 몇 달씩 살아봤던 나는, 친구는 어딜 가나 늘 그곳에서 새로 사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혼자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곳에 정착해 친구와 지인들을 사귀다 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작지만, 그 누구도 날 흔들 수 없는 나의 공간에 뿌리내리다 보니까 이 안정감이 삶을 지탱해 주는 엄청난 힘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다.


6살 때부터 초등학교 1년 1학기 때까지 살았던 동네에서 학기가 끝나던 날, 거의 매일 같이 놀던 서로 제일 좋아했던 동네 친구와, 학교에서 새로 사귀었던 친구가 서로 같이 놀자고 내 양팔을 끌어당겼다.


난 그때 그 안정감이 너무 좋았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나와 놀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 곧 안정감이었다.


그리고 그 방학 때 또 우리 가족은 아예 다른 도시로 이사 갔고 난 학교를 옮겼다.


하늘과 도로가 뻥 뚫린 이 동네에서 친구와 연인이 양팔을 당기는, 어릴 때 느꼈던 그 안정감을 느끼고 싶다.


지금 이곳에 모든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동네에 아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까 출퇴근 길에도 동네 지인을 종종 우연히 마주친다. 이야기가 나와서 최근에 했던 롱디 연애가 끝났다는 얘기를 했는데, 근처에서 만나라고 한다.


어쩌면 그게 답일지도 모르겠다. 내 모든 삶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이곳에 있으니 결혼할 사람을 초근거리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어떤 부분의 고집과 내가 추구하는 자유를 최대한 이해하고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이 동네에서 터전을 꾸릴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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