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패션 아이템에는 이유가 있다
아스피는 보호해야 하고 보호받아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차림으로 나간다.
편안하려면 모든 감각적 부하를 줄여줘야 한다. 햇빛으로부터, 시선으로부터, 소음으로부터, 추위로부터, 더위로부터, 냄새로부터, 그리고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모자를 써서 햇빛과 눈빛으로부터 보호하고, 색깔 안경이나 선글라스를 써서 전자기기의 빛, 인공조명, 바깥 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고, 마스크를 소지하며 냄새가 나거나 공기가 안 좋을 때 마스크를 쓴다. 그리고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이나 헤드폰으로 사람들의 소음으로부터 나의 영혼을 보호한다.
옷은 항상 레이어드로 입거나 소지해서 추위와 더위로부터 보호한다. 자동 체온 조절 기능이 조금 작동을 잘 안 하기에 아이템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럴 때 레이어드 만한 게 없다.
요즘 같은 4월 말의 봄철에는 반팔티에 후드, 청난방 레이어드면 시간별 기온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다.
후드집업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 밖에서 글을 쓰는 나에게 강한 햇볕으로부터 얼굴을 잘 보호해 준다. 나무 밑에서 낮잠을 청할 때도 머리를 벌레나 혹시 모를 벤치에 붙은 더러운 물질로부터 보호해 주고 눈도 가릴 수 있어 유용하다.
청남방이나 청자켓처럼 약간 질감이 딱딱한 옷은 튼튼해서 외부 위협이 있을 때 나를 잘 지켜줄 것 같다. 같은 아스퍼거여도 특정 감각에 대한 민감도는 사람마다 다른데 나는 촉각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민감하지 않아 따갑지 않다면 청바지나 트레이닝복 안감처럼 약간 까슬한 안감 소재, 니트류와 같이 질감이 느껴지는 옷을 선호한다.
신경다양인들이 신체의 존재감각과 위치감각을 잘 못 느낀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 몸의 각 부분에서 감각이 느껴지게 하는 질감이 있는 옷과 무게감이 있는 신발, 액세서리를 좋아한다. 질감과 무게감을 통해 내 발이 여기 있고 내 팔, 다리가 여기 있고, 내 손이 여기 있구나 하는 의식 속 존재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크록스를 제외하고 내가 좋아하는 신발은 부츠이다. 발목까지 잡아주니 다리와 발과 발목에 힘을 줘서 정성스럽게 걷지 않고 대충대충 아무렇게나 걸어도 잘 걸어진다. 바닥이 평평한 부츠는 딴생각을 하며 걸어도 넘어지지 않게 해 준다. 균형감각이 그렇게 좋지 않고 주의 깊게 걸어 다니지 않아 운동화나 다른 신발을 신었을 땐 발을 헛디뎌 발목이 꺾이는 일이 꽤 잦은데 부츠는 발목을 잡아준다. 이런 구체적인 이유를 인지하지 못했을 때도 늘 부츠를 좋아했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강하다.
특히 이런 트랙솔은 미끄러운 곳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을 것 같아 안정감이 있고 밑창의 틈과 입체성이 마치 멋진 건축물을 보는 것 같아 심미적으로도 만족스럽다. 페미닌한 옷을 입어도 패션을 중성적으로 만들어주면서 걸크러쉬함을 가미해서 청키한 부츠를 좋아한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이 청키하고 강력한 밑창으로 차버릴 수도 있다. 신발의 밑창은 강력한 심리적 지지대이기도 하다.
뾰족뾰족한 반지는 손가락 감각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만지면서 자기 자극(스티밍, stimming)을 하기에 제격이다. 그리고 지루하거나 불안할 때 묵주처럼 돌릴 수 있는 피젯토이(fidgeting toy) 역할도 한다. 내 인생에 안정감을 주는 비싸고 예쁜 장난감이다.
자폐인이나 아스퍼거가 아니더라도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 여성들이 많이들 액세서리를 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액세서리의 용도는 수시로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만지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것이다.
가방은 만일에 대비한 온갖 물품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큰 가방을 주로 멘다. 물건이 많이 들어가면 무거워지기에 가방 선택의 일 순위 조건은 수납이 잘되면서 가벼운 가방이다.
친구들이 전부터 도라에몽 가방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필요할 수도 있는 것은 다 있다. 아스피는 심심한 것을 못 견디고 혼자 있는 시간이 아주 많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아이패드나 책, 아니면 둘 다가 있고 충전기도 가지고 다닌다. 거기에 선글라스집, 용도별로 다른 안경이나 선글라스, 이어폰과 헤드폰 둘 다, 약간의 화장품, 핸드크림 같은 보습제, 헤어미스트 같은 향기 용품, 핫팩, 물티슈 같은 것들이 있다. 공포를 많이 느끼기에 고추 스프레이도 가지고 다닌다. 언젠가 넣어놓고 꺼내지 않은 간식이나 잡동사니들도 한구석을 차지한다.
감각적 예민함과 불안감을 줄여주는 것이 아스퍼거나 자폐인들의 패션의 목적이다. 아스퍼거하면 빅뱅이론의 쉴든처럼 실리콘밸리의 괴짜천재들의 체크무늬 남방 패션을 상상하겠지만 아스피들은 시각적으로 민감한 경우가 많아 옷을 잘 입는 사람들도 많다. 시각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진작가나 디자이너도 아스피들이 많이 택하는 직업이다.
아스피들에게는 지금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이나 몰입되어 있는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패션이 목적이거나 수단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다른 현재 중요한 것을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입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그렇게 중요도를 두지 않는다. 나의 패션 선택도 내가 추구하는 활동을 하기에 실용적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가,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름가운가가 가장 중요하다. 타인이 나를 볼 때 보이는 것보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패션 선택의 효과로 외부 자극으로 인한 일상 속 스트레스 지수가 낮고 내 눈에 예쁜 것들을 보며 실시간으로 행복감을 충전한다. 부가 효과로 코로나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고 크게 아픈 일이 잘 없다. 늘 항상성을 유지하며 어제도 오늘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 생각보다 흔한 당신 주변의 매우 민감한 사람들을 배려해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예쁜 내용의 대화를 나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스피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이라면 일반인들에게도 아주 편안한 공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