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코트, 곱슬머리 아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잠자던 기억의 힘줄이 당겨진다. 오래전이어도 모두 기억난다. 일곱 살에 입학한 여동생과 중간고사를 마치고 하교하던 나는 동생의 교문 앞에서 마주쳤다. 오후반이 있던 시절이라 등굣길이었던 동생은 나를 보자 반갑게 뛰어왔다.
“언니~나, 백 원만. 도화지랑 색종이 사야 해!” “없어!” 순간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주머니 속의 손은 이백 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핫도그와 설탕 묻힌 도넛을 바라보면서. 전날 밤부터 세운 계획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었다. 시험 마치고 투스텝으로 뛰어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절망한 표정이 된 동생은 “어제도 준비물 안 가져가서 벌 섰는데...” 동생의 긴 목이 스러지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돌아서는 어깨는 아래를 향해 쳐져있었고, 낮 해가 매일 입는 동생의 빨간 코트를 비추는데 꼬질 한 얼룩이 반사되어 더 잘 보였다. 동생을 부를 뻔했다. 하지만 부르지 않았다.
핫도그와 도넛이 너무 맛있어서 돈을 주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넛을 하나 남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돈이 없다고 한 거짓말 때문에 꾸역꾸역 털어 먹고 나자 혼이나는 동생모습이 떠올랐다. 청승맞은 눈동자는 밑에서 위로 눈치를 보고 있겠지. 손가락을 배배 꼬고 있겠지. 그러다가 더 혼나겠지. 그제야 가슴이 아파왔다. 그건 나 역시 당하고 있는 일이었다. 항상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해서 야단맞고,때론 잊고서 안 가져온 척하며 벌을 서곤 했다. 그래도 나는 중학생이니까 벌을 서도 견딜만했다. 하지만 국민학교 1학년 동생은 많이 가엽다. 가난한 집 딸이어서가 아니라 무관심한 집 딸이어서 더욱 가여웠다. 가난한집 아이는 그래도 엄마가 우산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하나뿐인 우산이어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종종 걷는 모습은 학교 현관 앞에서 부럽게 바라보던 정경이었다.
아마 엄마는 동생의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고 어딘가로 마실 나갔을 거다. 그걸 아는 내가, 그것 때문에 아팠던 내가, 백 원 때문에 동생을.... 얼마 후 얼굴이 붉어진 동생이 돌아왔다. 울었던 모양이다. 그때 처음 알았다.너무 미안하면 미안하단 말을 차마 할 수 없다는걸.
마무리 짓지 못한 이 기억의 파편은 뇌 속 어디에 붙어버렸는지. 그래서 가끔씩 뜨거운것이 울컥 올라와 눈가를 적시나보다.
사실 지금의 동생을 보면 딱히 불쌍할 것도 미안한 마음도 없다. 당당함을 넘어서 어찌 보면 살짝 건방지기도 해서 얄미울 때도 가끔 있다. 게다가 나보다 잘 살고 있다고, 내가 조금이라도 궁상맞은 말이나 행색을 하게 되면 대번에 타박이 날아온다. 그게 꽤나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니...
대체, 나를 울컥하는 그 아인 누구고 어디에 있는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토록 자립심 강하고 딱 부러지는 성인이 된 걸 보면 빨간코트를 벗지 못한 동생도 기억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 아이를 불러내야 할 사람은 바로 내가 돼야 하지 않을 까?
정말이지 영화 ‘어바웃 타임’처럼 과거를 다녀올 수 있다면 난 그날 학교 앞에서 동생을 기다릴거다. 도화지와 색종이를 사들고 핫도그 하나씩을 나눠먹고 오고 싶다. 딱 그 시간 만큼만. 그 시절은 오래 머물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