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부리고 싶어 질 때는 날씨가 크게 좌우한다. 비가 적당히 오는 날은 유리 창에 부딪치는 걸 보려고, 찬연한 날엔 날씨가 아까워 버스에 오른다. 목적지는 오일장이다. 내리지 않을 때도 있지만 장에 간다고 상상하면 푸근해진다. 그날도 햇빛에 졸여진 공기가 달콤해서 자꾸 들이키고 싶은 4월이었다.
귓불에 살랑이는 바람이 감질나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끝자리에 앉았다.
단이 높은 뒷자리는 내려다보는 재미도 있고 사람들과 접촉도 가장 적은 곳이라 선호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창문을 열어도 민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꾸만 썸타자고 덤비는 봄바람을 외면할 지조가 없었으니 창문을 열었다. 눈을 감고 속도를 입은 바람을 만끽한다.
이런 냄새가 나는 바람과 리듬을 맞춰주는 머리카락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혼자여도 좋을 것 같았다. 거기에 김필의 '다시 사랑한다면'을 들으면서 난 최면과도 같은 봄날의 정점을 즐기고 있었다. 순간 장날소리와 냄새가 났다. 싸다는 소리가, 참기름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장에 온 모양이다.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득한 꾸러미들을 가지고 버스를 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버스에 오른다. 한 할머니가 뒷자리까지 와서 앉는다. 구부정한 할머니는 욕심껏 장을 봤다. 할머니가 내 앞자리에 앉자 외할머니한테서 나던 냄새가 났다. 잠시 허락 없이 어디쯤, 그리운 곳으로 다녀오고파 그녀를 빌어 쓰고 만다.
그 순간이었다 "아, 괜찮아요. 일어나지 말아요!" 단호한 목소리에 시선이 쏠렸다. 서있던 중년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할머니 앞 여학생이 반쯤 일어나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극구 마다하는 거절에 여학생은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앉았다. 중년아저씨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중년의 아저씨는 아직 자리를 양보받을 나이는 아니신 게다. 단지 귀밑머리가 조금 희끝하셔서 그렇지 나이는 얼마 안 되신 거 같았다. 하지만 어린 여학생이 보기엔 머리가 희끝한 아저씨가 노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거다. 착한 여학생이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한답시고 일어난 건데 너무 단호하게 거절하시니 민망해진거고.
여학생은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 것 같았다. 말도 작게 하고 얼굴도 쉬이 빨개지는 걸 보니 말이다. 내 눈에는 그 빨강이 정말 사과같이 예뻐보였다. 어르신을 생각하는 마음도 수줍음이 많은 성격도 너무도 어여뻤다.
마치 점점 사라져가는 천연기념물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내가 저 중년 아저씨라면 어떻게 할것인가를....
그 분을 이해한다. 노인처럼 보이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나라도 거울을 보고 또 보고. 얼굴을 당겨보고 하다가 결국 시술 결심까지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일단은 그 어여쁜 '경로우대'는 받고 보겠다. 점점 희귀해지는 우리의 보호종들은 지키고 볼일이다. 그 여학생처럼 수줍음이 많은 아이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 다시 양보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물러나기 때문이다. 그 여린 마음들이 다치지 않게 차라리 내가 백번 천 번 늙고 말 것이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