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 이젠 해가 보이지 않아도 어둡지 않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걷고 싶은 기온과 바람과 봄에만 나는 냄새가 났다.
내피 있는 버버리 코트를 사무실에 걸어둔 채 나온 상태다. 멀리 들리는 제목 모를 노랫소리는
듣기 좋다. 모든 게 적당한 저녁이다.
"난 몇 년도의 노래부터 모르고 사는 걸까?"를 생각하면서 탄천길을 건너고 공원을 가로지른다.
농구 골대 앞에서 아이들이 공을 넣고 있었다. 골대를 맞고 튀어나온 공이 굴러온다. 공을 던져 줄 찬스를 바랐다. 운이 좋았는지 뛰어 올 수 있는 아이가 미적거린다. "나이스!" 던져준 공이 어쩐 일로 제대로 가서 안겨준다. 오래전, ' 텔레파시'라고 했던 그것이 통하는 기분이 생각보다 괜찮다. 이럴 때 듣는 고맙단 말에 걸음이 빨라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성장판 열렸을 때 콩콩 많이 뛰어라."며 오지랖 넓은 생각을 하며 지난다.
공원 한가운데서
강아지 한 마리가 산책을 만끽하고 있다. 신나는 감정을 저토록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부러울 따름이다.
키 보다 배는 높게 뛰어오르다 뱅뱅 거리며 견주의 다리 춤을 맴돈다. 절로 미소가 지어져 한껏 광대를 부풀렸다가 툭 떨구며 돌아선다. 집에 누워있는 노쇠한 우리 집 댕댕이를 생각하며 "사람이나 개나 나이를 먹으면...." 하며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이 자취를 감춘 줄 알았는데, 남은 빛은 건너편 도로의 바닥부터 번져 오른다.
저녁이 밤으로 익어가는 중이고 약간 소란스럽다.
이런 시끌함은 나쁘지 않다. 도로에서 나는 소리와 여럿이 다글다글한 백색소음.
저녁 어스름에 웅웅 거림은 모네의 유화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람이 분다.
하루의 고단함을 덖어낸 어스름한 냄새가 좋다. 변하지 않았다.
꽈리고추와 깻잎이 졸여지던 산동네. 그 골목길에서 나던 냄새다.
후각이 제일 오래 남는 기억이라는 말이 맞나보다.
어느새 낡은 철 문을 열고 그 날의 마당에 들어선다. 놀다 지쳐 들어선 방 안엔 그저 따스하기만 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늦었다고 나무랬지만 서운치 않았던 엄마가 있었다. 평범했으나 가장 아름다운 날인 줄 몰랐던 저녁 .
"엄마, 나 이제 울 식구 밥 먹이러 들어가요."라며 발길을 재촉한다.
이 산책에 목적지가 있어 고맙다. 이 맘 때에 정처 없는 걸음은 너무 쓸쓸하잖은가.
진즉에 켜져 있던 가로등이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산처럼 나무처럼 까맣게 걸어갔다. 따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