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 이 Mar 22. 2023

저녁 어스름을 걷다.

퇴근시간, 이젠 해가 보이지 않아도 어둡지 않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걷고 싶은 기온과 바람과 봄에만 나는 냄새가 났다.

내피 있는 버버리 코트를 사무실에 걸어둔 채 나온 상태다. 멀리 들리는 제목 모를 노랫소리는

 듣기 좋다. 모든 게 적당한 저녁이다.

"난 몇 년도의 노래부터 모르고 사는 걸까?"를 생각하면서 탄천길을 건너고 공원을 가로지른다.

농구 골대 앞에서 아이들이 공을 넣고 있었다. 골대를 맞고 튀어나온 공이 굴러온다. 공을 던져 줄 찬스를 바랐다. 운이 좋았는지  뛰어 올 수 있는 아이가 미적거린다. "나이스!" 던져준 공이 어쩐 일로 제대로 가서 안겨준다.  오래전, ' 텔레파시'라고 했던 그것이 통하는 기분이 생각보다 괜찮다. 이럴 때 듣는 고맙단 말에 걸음이 빨라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성장판 열렸을 때 콩콩 많이 뛰어라."며 오지랖 넓은 생각을 하며 지난다.


공원 한가운데서

강아지 한 마리가 산책을 만끽하고 있다. 신나는 감정을 저토록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부러울 따름이다.

키 보다 배는 높게 뛰어오르다 뱅뱅 거리며 견주의 다리 춤을 맴돈다. 절로 미소가 지어져 한껏 광대를 부풀렸다가 툭 떨구며 돌아선다. 집에 누워있는 노쇠한 우리 집 댕댕이를 생각하며 "사람이나 개나 나이를 먹으면...." 하며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이 자취를 감춘 줄 알았는데, 남은 빛은 건너편  도로의 바닥부터 번져 오른다.

저녁이 밤으로 익어가는 중이고 약간 소란스럽다.

이런 시끌함은 나쁘지 않다. 도로에서 나는 소리와 여럿이 다글다글한 백색소음.


저녁 어스름에 웅웅 거림은 모네의 유화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람이 분다.

하루의 고단함을 덖어낸 어스름냄새가 좋다.  변하지 않았다.

 꽈리고추와 깻잎이 졸여지던 산동네. 그 골목길에서 나던 냄새다.

후각이 제일 오래 남는 기억이라는 말이 맞나보다.


어느새  낡은 철 문을 열고 그 날의 마당에 들어선다. 놀다 지쳐 들어선  방 안엔 그저 따스하기만 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늦었다고 나무랬지만  서운치 않았던  엄마가 있었다. 평범했으나 가장 아름다운 날인 줄 몰랐던  저녁 .


"엄마,  이제 울 식구 밥 먹이러 들어가요."라며 발길을 재촉한다.

 이 산책에 목적지가 있어 고맙다.  이 맘 때에 정처 없는 걸음은 너무 쓸쓸하잖은가.

진즉에 켜져 있던 가로등이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산처럼 나무처럼 까맣게 걸어갔다.  따스하게.










작가의 이전글 예쁜 배려에 내가 늙으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