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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May 21. 2024

말실수

'민폐 끼치지 마라.'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말이다. 민폐인지 아닌지는 '눈치'를 봐야 알 수 있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도 눈치를 다.  민폐인지 아닌지 사전 선별 작업을 꼭 거쳐야 한다. 내 말과 행동은 민폐가 아니라고 인식해야 출력된다. 나 때문에 누군가 불편해하지 않을지 끊임없이 주변을 살펴왔다.


문제는 민폐의 기준이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줏대가 없고 근거도 항상 빈약했다. 난 상대의 미묘한 얼굴 근육의 변화, 무겁고 느려진 말투, 어색한 공기에서 민폐의 근거를 찾는다. 상대가 불편하다고 직접 티를 낸 적이 없어도 내가 추측하기에 그런 것 같으면 어김없이 검열과 반성의 시간을 보낸다. 이불을 걷어차고 흑역사를 만든 것을  후회한다. 이렇게 민폐만 끼치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말이다.

 

그래서 난 확신이 없다. 나의 말과 행동이 민폐인지 아닌지 매 순간 머릿속에서 선별, 출력하는 작업이 바쁘다. 내가 상대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고 있는 건지, 대화 속 적당한 반응을 잘하는지 모르겠다.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잠재적인 불안이 항상 가슴 언저리에 도사리고 있다. 아무리 맥락을 고려해도 많은 변수와 개개인의 생각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하게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말실수로 타인의 마음에 구멍을 내면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바에 입을 닫는 편이 속편 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은 내향적인 성격 탓이라 치부해 버리면 주변 사람들은 이해해 줬다. 다만 중고등학교 때 같이 다닌 친구들은 나와 정반대였다. 말을 잘하거나 재밌게 하는, 소위 말로 영향력을 끼치는 친구들이었다.
난 조용히 친구들의 수다를 경청하며 부러움을 삼켰다. 실수해서 민폐 덩어리가 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어쩌면 난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며 꽤 오랜 시간을 거쳐왔다.

생각의 전환은 성인이 되어서야 일어나게 된다. 난 그 사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많이 좋아하고 존경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더 많이 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이제 너도 말 좀 해봐'라던가 혼자서 대화를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이나 압박감을 그 사람 표정에서 읽을 때서야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대화의 격률 4가지 가운데 양의 격률이란 게 있다. 대화 참여자는 대화의 목적에 맞게 적절한 양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난 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만 애썼으니 필요 이하로 정보를 제공하는 대화 참여자로서 양의 격률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일이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말실수를 하기 싫어 상황을 회피했지만 아이들을 가르칠 땐 온전히 나의 말로 수업을 이끌어가야 한다. 다만 내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 정해진 수업 내용에 따르면 되는 것이라 실수에 대한 긴장감이 덜하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예비고 1로 올라가는 겨울 방학 특강 때 내 수업을 몇 번 듣고 그만두는 아이에 대해 원장님이 이유를 슬쩍 말해주셨다. 선생님이 이것도 모르냔 식으로 말해서 아이가 상처받았다는 것이다. 내 대답은 '기억이 안 난다'였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인터뷰한 걸 보고 금수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혀를 찼던 변명이 내 입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진정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학생을 많이 답답해했던 내 감정만 기억난다. 그때의 내 어투와 표정, 당시 상황의 앞뒤 맥락, 서로 간 형성해야 했던 친밀감이나 신뢰 관계의 부족함,  그 아이가 내게 쌓아 올린 감정의 조각들 등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는 아이가 학원을 그만두고 싶어 갑자기 지어낸 핑계일 수도 있고 우연히 아이의 피해의식을 건드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도 아니며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었다.

나도 억울한 점은 있다. 가르쳐주면서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주었는데도 처음 듣는 것처럼 물어올 때, 과제나 복습을 하나도 하지 않은 티가 날 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의 상황이다. 앞으로의 수업이, 그 학생과의 관계가 암담할 뿐이다. 절실하지 않은 학생을 혹독하게 공부하도록 이끄는 것은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난  내가 타인에게, 그것도 어린 학생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합리화를 했다. '내가 저 나이였을 때는 어른이나 선생님께 혼난다면 어떻게든 인정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요즘 애들"은 유약하는구나'라는 꼰대 같은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내가 누구에게 상처받았으면 받았지, 줄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탓이다. 난  내 스스로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전제를 배제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선하고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던 것이다. 이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떨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거쳐온 데 대한 면죄부였을까. 거대한 나만의 환상이 깨진 순간이었다.

돌아보면 내 실수임을 인지하고, 상대에게 미안함을 갖고, 지난 내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보통 내가 실수했다는 생각조차,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찰과 후회, 부정과 수용을 거듭한 결과 난 언제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 난 타인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상처를 줄 수 있다. 나란 존재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평범함을 표방하듯이 상대도 내게 그러한 존재이다. 선한 의도로 말을 했어도 항상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우연찮게 상황과 상대에 따라 내 말이 상처가 된다 해도 그저 지구에서 몇 백 몇 천 번 동시에 일어나는 특별하지 않은 실수일 뿐이다.

다만 나의 실수는 스스로에게만큼은 엄격히 다루어져야 한다. 타인의 실수로 인한 내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 어찌저찌 봉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나버린, 엎지른 물인 나의 실수를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나'라는 인간은 과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 답보 상태에 빠져있을까? 동해바다의 너른 품을 닮기 위해 살아가고 모진 채찍질이 스스로에게 향한다면 언젠가 답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동해바다 - 후포에서

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 만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하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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