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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May 18. 2024

새미와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영원히 추억하며

2023.03.11

새미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일주일째다. 어제도 퇴근해서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거실 소파 밑에서 무의식적으로 새미를 찾았다. 생각날 때마다 허공에 대고 괜히 이름을 불러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들 모두 새미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동영상을 돌려본다. 유튜브에 시츄를 검색하고 비슷하게 생긴 강아지 영상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쓸모없는 짓이란 걸 안다. 금방이라도 발소리를 내며 종종걸음으로 집 어딘가에서 나타날 것 같다.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잠깐 들를 순 없는 걸까. 부재를 통해 존재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난주 금요일 부모님은 평택에 있는 외할머니댁에 내려가셨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미를 데려가셨다. 하루 전부터 이상하긴 했다. 새미가 힘이 없어 보였고 가만히 있는데도 숨이 차서 헥헥댔다. 거실에 혼자 자게 두면 안 될 것 같아 내 방 침대에 눕히고 재웠다. 자기 직전까지 얕게 헐떡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상태가 괜찮은지 계속 확인했다. 숨이 가쁜 생명을 지켜보는 밤이 참 길었다. 평택에 내려가기 전에 부모님이 데려가려고 하자 다시 몸을 돌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어딘가 떠나는 것 자체가 무리로 느껴졌던 걸까. 그렇게 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품에 꼭 안아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졸려서 잘 갔다 오라고 인사만 간단히 했다. 새미는 그렇게 부모님과 평택으로 떠났다.

퇴근 후 다음날 출근을 위해 잘 준비를 하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화야, 새미가 좀 이상해.. 저녁에 산책을 했는데 거의 걷질 못했단다. 할머니 댁에서 오줌을 지렸는데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온몸에 묻히고도 가만히 있더란다. 아닌데. 어제 헐떡거리고 힘들어하긴 했지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산책도 씩씩하게 하고 들어왔는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일 일이 끝나고 바로 평택으로 내려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이 올 리가 있을까. 눈을 감는데 숨이 막혔다. 어떡해. 어떡하지. 불안과 두려움의 덩어리가 뭉쳐 눈덩이가 되고 산으로 쌓여 나를 덮쳤다. 새벽 4시까지 뜬 눈으로 밤샜다. 7시에 눈을 뜨니 핸드폰에 떠 있는 아빠의 부재중 한 통과 선화야 새미 죽었다.. 문자 하나. 초점 없는 눈에 수건으로 돌돌 싸인 채 엄마에게 안겨 있는 사진도 와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따 일 끝나고 평택 내려갈 테니까 나랑 같이 묻으러 가면 안 돼? 말도 안 된다는  말하면서도 알았다. 퇴근하면 오후 6시고 평택에 내려가는 시간만 2시간이 걸린다.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이미 차가워진 새미를 안아 볼 수 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내 욕심으로 새미가 편하게 쉬지 못하고 오랜 시간 거실 바닥에 누워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따스한 햇볕이 있을 때 묻어줘야 하는 것도 알았다. 결국 햇볕 잘 드는 곳에 묻어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 대신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해줘. 모든 게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가슴이 꽉 막혔다. 새미는 외가 어른들을 모신 산소 주변에 묻혔다.


새미가 우리 집 가족이 되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릴 때부터 일요일 오전에 일어나서 동물농장을 틀어놓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았던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 동생과 함께 길고양이를 붙잡아 집에 무작정 데려와서 아빠께 혼나고 다시 놓아주기도 했다. 이런 난리를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미용실에서 동네 아주머니와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된다. 아주머니는 본인이 알레르기인 줄 모르고 최근에 데려온 강아지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셨다. 엄마는 아이들이 이렇게나 동물을 좋아하고 원한다며 변호하셨고 순식간에 입양이 이뤄졌다. 카키색 나시와 반바지를 입은 엄마가 새미를 껴안고 현관문으로 들어서던 모습이 선명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새미를 부르는 애칭이 많았다. 애기, 공주, 이쁜이, 천사, 단추, 털순이, 돼지, 막내, 순둥이, 바보.. 새미라는 이름만 알아들어서 가장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게 아쉽다. 따끈한 온도의 생명은 애칭만큼 가족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고 온정을 배로 돌려주었다. 자그마치 15년의 세월이다. 그 빈자리에 헛헛함만 남았다. 나이가 들면서 새미는 집안에서 오줌을 지릴 때가 많아졌다. 산책 횟수는 최근에 4번, 5번까지도 늘어났다. 일이 끝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면 밤에 산책을 나갈 힘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나중에 후회할 걸 알면서도 쓰러져 자기도 했다. 그래, 못 해준 것만 생각나서 뒤늦게 후회하고 가슴 아파하고 있다.

강아지의 수명만큼 살다 가서 호상이려니, 교통사고로 탈구된 다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려니, 병으로 오래 앓다 가지 않아서 다행이려니, 외가 가족들에게 둘러싸이고 제일 좋아하는 엄마 품에 안겨 눈을 감아서 외롭지 않았으려니 머리로는 생각한다. 하지만 평생 짖는 소리 몇 번 듣지 못할 만큼 순하고 아픈 걸 티 내지 않던 아이다. 죽기 직전 비명 소리를 크게 2번이나 내고 몸을 펄떡펄떡거렸다고 한다. 숨이 서서히 끊어지는 것이 그렇게나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왜 그 고통을 나누고 같이 아파할 시간을 주지 않고 떠났니. 야속한 마음은 내 이기심이다. 사실 새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새미는 상상도 못 하겠다.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고 손으로 만져보질 못했으니까. 이 상실감은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아야 한다.

새미는 존재 자체가 내게 구원이었다. 마음이 지친 날 옆에 새미를 뉘여 놓고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말랑거리는 발바닥을 만지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뜨끈한 배에 볼을 비비면 인류애가 저절로 샘솟았다. 이게 사는 거지.. 행복이 별 거 있나 싶었다. 그 작은 생명체를 통해 온기를 느끼고 세상을 조금은 사랑스럽게 바라봤었다. 아, 내가 새미에게 많이도 의지했음을 실감한다. 사랑은 자해다. 사랑한 만큼 공백이 고통스럽다. 끝은 예고 없이 덮쳐 온다. 죽음이 덧없음을 깨닫게 한다. 사랑한다고 매일 속삭였는데 그래도 아쉽다. 더 해줄걸. 온마음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랑받고 사랑으로 채워진 건 나였다. 함께한 기억은 순간으로 남았다. 하지만 추억은 영원이겠지.

인간으로서 차마 따라 할 수 없는 맹목적이고 순도 높은 사랑. 너에게 받은 그 사랑, 소중히 품고 살아갈 테니... 새미야, 편히 쉬어. 사랑해.

새미와의 행복했던 순간을 영원히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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