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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May 17. 2024

쇠와 나무 사이 어딘가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 부모가 아이의 자질을 제대로 알고 그에 맞춰 교육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예를 들어 금쪽이가 편식을 하며 부모의 말을 안 들으면 반항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구강 내 촉각이 예민해서 질긴 것을 못먹는 상태였고 고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내가 어떤 감각에 예민한지 알고, 그에 따른 어려움을 어떻게 다루어낼 것인지가 중요하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나의 예민함, 그에 따른 어려움들을 돌아보았다. 난 청각에 예민하다. 이는 쇠로 된 것들을 싫어하는 내 취향과 연결된다. 자동차, 자전거, 까끌까끌한 철수세미, 깔끔한 식당이라면 필수인 스테인리스 인테리어, 대형견의 목을 옭아매는 초크체인, 보석류를 파는 공방이나 금은방, 아파트 조형물인 동상들. 쇠로 된 것들을 보면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다.

한번은 호기롭게 살을 빼겠다며 다이어트 의지를 다지고 몇 달 간 헬스장에 매일 드나들었다. 운동이 취미였던 적이 없으니 꾸준히 하다 보면 좋아지겠지 생각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운동에 열중해있으면서도 내가, 다른 사람이 내려놓는 아령 소리 때문에 항상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싫은 건 싫었던 것이다. 깡깡 소음을 내며 부딪치는 소리는 다이어트 목표 달성과 동시에 헬스장에 발을 끊게 만들었다.


반대로 나무와 관련된 것들을 좋아한다. 나무는 조용하다. 자비로운 생명 그 자체이다. 또한 존재만으로도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가로수길을 걸을 때면 가슴 가득히 충만함이 차오른다. 나무로 된 도마를 쓰며 요리를 능숙하게 하는 것이 로망이지만 관리도 어렵고 세균의 온상이라 하니 못 쓰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릴 때부터 도서관을 좋아했던 이유도 온통 사방이 나무 천지였기 때문이다. 굳이 책을 읽는 목적이 아니어도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으면 책을 통해 나무의 숨구멍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만의 서재를 상상해 본다. 언제나 따스한 햇볕이 스며드는 해리포터의 후플푸프 기숙사처럼 나무 인테리어로 안락하게 꾸미고 싶다.

쇠로 된 것들을 보거나 닿기만 해도 무의식적인 거부감부터 드니 운전면허를 딴 것은 내겐 기적이었다. 기능시험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고배를 마셨다. 말도 안 되는 실수 연발에 실격은 또 얼마나 많이 당했는지 부끄러운 기억이다. 돈도 아까웠고 반포기 상태였지만 아빠의 끈질기고 자상한 가르침으로 2년 만에 합격했다. 합격한 이후에도 혼자 차를 몰고 다니기엔 공포스러웠다. 카트라이더 같은 게임에서는 질주하다가 다른 플레이어를 밀쳐도 괜찮았고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자동으로 트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선 마음대로 플레이 버튼을 누를 수도 없었다. 도로 위의 모두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 같아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전환점은 이직을 하면서 뜻밖에 찾아온다. 12월의 추운 바람을 맞으며 역까지 걸어다니기 싫어  꾸역꾸역 차를 운전하게 되었다. 과정은 험난했다. 혼자 타는 것조차 무서워서 한동안 아빠를 옆에 태우고 다녔다. 오래된 상가의 주차장 통로가 너무 좁은 탓에 차문을 긁고 다녔다. 페인트를 직접 사서 덧칠했지만 고물차가 되어 버렸다.  접촉사고를 내서 경찰서에 가 조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5달 동안 똑같은 길로 매일 다니니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차가 멈춰 있을 땐 화장을 고치고 음악을 즐길 때도 있었다. 이젠 부모님께 능숙하게 주차를 잘한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을 만큼 운전 실력이 발전했다. 내게 운전이란, 쇠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기피했던 숙원을 풀고 인생의 큰 장애물을 뛰어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부작용이 생겼다.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익숙해지니 걷는 것이 귀찮고 힘들어졌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예전엔 편도 50분 거리를 당연하게 걸어다녔다. 집과 역까지 10분 거리인데도 너무 멀다고 느꼈을 때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난 분명 걷는 것을 좋아했다. 산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 그늘 사이로 보이는 눈부신 하늘,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낭만적인 화폭으로 담게 하는 음악도. 쇠가 주는 불편함을 넘어 편리함을 갖게 되니, 편리함에 젖어 날 쉽게 행복하게 했던 것들을 잊고 있었다. 결국 난 편리함을 포기했다. 출퇴근할 때마다 30분 이상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집을 얻게 되었다.

차를 운전했던 몇 달간의 나와 지금의 난 또 다른 것 같다. 아니 원래의 나로 돌아온 것 같다. 발을 직접 땅에 닿고 떼며 내 눈은 순간순간 천천히 바뀌는 풍경들을 담아낸다. 뒤죽박죽인 마음도 걷는 순간만큼은 어디론가 쓸려내려간다. 감정의 물결은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 소리에 흩어진다. 난 나무를 매일같이 바라보는 뚜벅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내 취향은 편향되었다. 하지만 치우쳐진 채 한 방향으로만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평생 하지 못할 것 같았던 운전도 잘 하게 되었으니까. 이젠 자전거 타기 연습 중이다. 난 균형을 잡아나가는 중이다. 내가 현재 서 있는 지점은 쇠와 나무 사이 그 어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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