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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May 24. 2024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랑, 보통과는 다른 생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서평

‘보통’의 경계 저편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렇다면 특별함의 ‘다름’은 보통의 ‘평범함’과 양립할 수 있을까? 한때 열정에 불타는 운명적 사랑을 꿈꿨다. 하지만 더 이상 고려 대상이 아니다. 뛰어나지 않지만 열등하지도 않은 중간 지점에 닿아야 한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거나 기복 없는 평탄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이 적당한 온도가 안온하다. 누군가는 평범한 게 제일 어렵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남들과 다르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간다.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평범해지기 위한 삶은 ‘다름’에 대한 불안을 담보로 한다.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은 사회 경계 밖에서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다. 14살의 무슬림 출신 고아 모모는 습관적 절도와 똥을 싸고 다니며 기행을 일삼는다. 미래에 테러리스트가 되는 꿈을 꾸는 철없는 소년이다. 모모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1970년 파리 빈민가의 밑바닥 인생을 산다. 로자는 젊은 시절 매춘부로 일하다가 늙어서 창녀의 아이들을 돌보며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는 유대인 여성이다. 또 불로뉴 숲에서 몸을 파는 여장 남자 롤라, 평생 양탄자 행상인으로 떠돌다가 치매가 온 하밀, 정신병으로 친엄마를 살해한 모모의 친아빠 유세프 카디르가 있다. 하지만 이들도 보통의 생을 살아가고 평범한 사랑을 한다. 그중 모모의 사랑은 순도 높고 눈부시다.

모모는 훔쳐서 데려 온 푸들 쉬페르를 끔찍이 사랑하지만 포기한다. 부유해 보이는 부인에게 떠보듯 부른 가격 오백 프랑에 입양 보낸다. 정작 모모는 돈을 하수구에 버리며 눈물을 흘린다. 같이 사는 아이들과 로자 아줌마의 성화에도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여긴다. 진정으로 쉬페르를 사랑했던 건 자기뿐이라며 확신한다. 또 안전한 곳에 쉬페르를 보내게 되어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모모에겐 그까짓 돈 몇 푼이나 필요에 의한 소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쉬페르가 더 안전하다면 기꺼이 보내주며 행복을 빌어준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역설이 모모에겐 가능하다.

모모의 사랑은 생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모에겐 옷을 입히고 이목구비를 그려 넣은 우산 아르튀르가 있다. 거리에 나가 어릿광대짓을 하며 같이 용돈을 버는 친구이다. 모모는 아르튀르의 부러진 곳을 고치고 치장해 주며 밤에는 꼭 끌어안고 잔다. 성우 나딘의 호의 가득한 제안을 거절하며 도망칠 때도, 죽은 로자의 곁을 지킬 때도 언제나 함께였다. 타인이 자신과 아르튀르를 연민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든,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모모는 사랑 앞에선 부끄러움을 모른다. 모모는 로자의 시신 정리 후 홀로 집에 버려진 아르튀르를 찾아 끝까지 책임진다.

소설은 ‘사랑해야 한다’는 구절로 끝난다. 여기서 ‘생’과 ‘사랑’의 인과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닭과 달걀의 시초를 따지는 순환 논쟁의 무익함은 제쳐 두자. 모모에게서 샘솟는 사랑의 기저를 찾기 위함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걸까. 대개 모모를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할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 끊임없이 애정을 구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안정 애착을 형성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모모가 어떤 대상에게든 애정을 붙여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모모의 사랑을 고통스럽고 버거운 을 살아가기 위한 궁여지책의 선택으로만 국한할 수 없다.
 
버려진 아이가 입양을 가려면 조건이 있다. 나이는 어려야 하고 건강한 신체에 정신질환이 없어야 한다. 버림받았지만 또다시 사랑을 받으려면 통과해야 하는 전제 조건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려면 바라는 게 많았다. 조건을 내걸고 이에 맞지 않는 경우엔 버렸고, 다시 버려졌다. 모모는 진심을 다해 사랑하지만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을 대가 없이 쏟아붓는다. 이미 숨을 거둔 로자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키며 혼자 외로울 그녀 걱정만 한다. 모모는 사랑하기 위해 살아간다. 모모의 ‘생’은 ‘사랑’을 지향하기에 살아갈 의미가 있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처음 모모의 물음에 하밀은 어린 나이에 모르는 게 낫다며 대답을 회피하고 진심을 숨긴다. 하지만 후반부 모모의 같은 물음에 하밀은 묻어두었던 젊은 날에 사랑했던 여자를 떠올린다. 앞을 보지도,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말이다. 깜짝 놀라며 입을 열지 않는 하밀의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누구나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한 시간을 품고 산다는 것을. 우리는 열렬하지만 순수한 사랑의 불씨를 가슴에 묻어두고 생을 산다.

달걀을 훔친 모모는 가게 주인 여자가 뺨 갈기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오히려 달걀 하나를 쥐어 주며 모모에게 애정 어린 뽀뽀를 해 줬다. ‘겨우 달걀 하나뿐이었는데 생이 거기 달려 있었다.’ 여섯 살의 모모는 그녀에게 받은 한 줌의 사랑이 '다름'을 알았다. 작고 평범하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그 사랑에서 생을 살아가는 의미가 존재했다. 그래서 모모의 사랑은 전제 조건이 없다. 사랑하면 그뿐. 모모의 방식대로라면 우리의 ‘생’은 열렬히 사랑하고 살아가기에 충분하다.

<자기 앞의 생>의 프랑스어 원제목 La vie devant soi는 ‘앞으로의 생’을 뜻한다. 앞으로의 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보통의 평범한 사랑을 쏟는 특별한 생을 선사할 차례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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