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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Oct 11. 2024

정도(正道)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나의 선택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감상문

저자는 철저히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인 인간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여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처럼 끔찍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없어도 죽음과 같은 고통이 행간에 드러난다. '환경의 노리개'로써 휘둘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목도하며 무력함을 느낀다.나라고 수용소의 인간 군상들과 다를까. 악랄하고 무감각한 감시병이 되어 껍질 안의 감춰진 적나라한 내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저자는 극한의 스트레스 환경에서도 무감각을 극복하고 불안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며 자유와 선택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또한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는 아무도 뺏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수용소의 병들어가는 몸뚱이들은 만성적인 수면 부족과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자들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빼앗긴다. 책의 원고를, 꿈으로 엿본 해방될 미래의 희망을, 폭력과 배고픔으로 채워진 하루를 영원한 것처럼 느끼는 시간 감각을. 죽은 사람도 예외가 없다. 체온이 남아 있는 시신을 뒤져서 먹다 남긴 감자를 낚아채고, 신발과 외투를 자기 것과 바꿔 가져간다. 하지만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와 책임이 있다. 매 순간 인간으로서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할 것인지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결국 짐승의 삶을 선택한 ‘돼지’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성자’로 판가름 난다.


그렇다면 떠들썩하게 보도되는 사회면 기사를 읽을 때마다 던져지는 질문에 저자의 말을 빌려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인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악인은 만들어진다'는 답은 범죄자라는 환경의 산물을 만들어낸 사회적 규제의 부재에 집중하고 제도적 개선을 모색한다. 이에 저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될 것인가는 환경의 영향보단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말한다. 가해자의 서사를 서술할 때 단골 소재로 나오는 은둔형 외톨이, 불우한 가정은 그들의 범죄를 합리화해주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지만, 그 안의 개개인이 모두 악의 마음을 품고 살지 않는다. 저자는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종국에 수갑을 차고 범인의 얼굴을 한 추레한 짐승의 모습이 본인이 선택한 결과물이다.

나 또한 인간이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이것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기저가 됐다. 가정환경이 어릴 때의 나를 만들었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니까, 돈이 부족하거나 더 필요하니까, 사랑하는 이들이 의심하거나 그들에게 응원받지 못하니까. 만들어낼 핑계는 무궁무진하고 그럴듯했다. 돌아보니 주어진 환경만 탓하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선택한 나였다.

초등학생 때의 색 바랜 기억은 언제나 불편하다. 서예, 그림 그리기, 글짓기, 글씨 쓰기 등 각종 대회에 반 대표로 나가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이후 대회에 다시 출전하지 않았다. 엄마는 의아해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기를 고집했다. 스스로도 이해 안 되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난 다시 상을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꼭 상을 받아야 한다고 압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칭찬에 인색한 엄마도 상을 받아오면 잘했다고 활짝 웃으며 엉덩이를 토닥여주셨다. 상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는 오로지 내 안에 있었다. 같은 대회에서, 비슷한 종목에서 다시 상을 받지 못하면 난 그저 초심자의 행운에 당첨된 행운아였을 뿐이다. 볼품없는 내 진짜 실력이 모두에게 낱낱이 까발려질까 봐 무서웠다. 난 대회에 나가기 싫은 것이어야만 했다.

내 실력을 믿지 못했고 증명할 자신도 없었다. 상을 받은 건 순전히 운이 작용했을 테니까. 대회에 출전하여 상을 받지 못하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나 자신에게 가질 수치심과 절망감은 굳이 겪지 않아도 명약관화했다. 학창시절 내내 대회 소식이 들릴 때마다 죄인처럼 전전긍긍했다.

지금의 나도 초등학생의 나와 다르지 않다. 글을 써야 하는데 완성도 높은 글을 못 쓸까 봐 불안에 떨며 시작도 못 하고 지쳐버릴 때, 마음에 들지 않은 글을 써놓고 제대로 고치지도 못할 때, 아침 일찍 일어나도록 알람을 설정했는데 못 일어났을 때, 다이어트를 결심했는데 식욕에 못 이겨 탄수화물이 음식을 먹어버렸을 때. 사소한 실패에 스스로 낙인을 찍는다. 그럼 그렇지, 한심하고 쓸모도 없는 존재라고. 그 낙인은 멍울처럼 남아 내 꼬리표가 된다. 실패해도 끊임없이 시도하고 꾸준한 행동으로 실천하는 건 선택하지 않는다. 한심한 나를 탓하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주변 환경을 탓하는 건 제일 쉬운 선택이다. 주변 환경 속 나의 못난 모습을 탓하기만 하는 것도 뻔한 선택이다. 못난 나의 모습 중 한 가지는 승산이 확실한 것만 선택한다. 남겨진 선택지는 원래 싫어했고 하고 싶지 않았다고 자위한다. 시도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채 호불호 뒤로 면피하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되질 않는다. 뿌리 깊이 박힌 나의 결핍은 언제, 어디에서 씨앗을 싹텄길래 여태 제자리걸음일까. 내 가정은 불행한 면면들이 있었지만 행복한 시간도 많았고 부모님은 날 모자람 없이 키워주셨다. 길바닥에 버려진 일회용 커피컵을 보고 호되게 나무라는 양심의 문제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양의 미덕까지 가르쳐주셨다.

바다 수영도 했고 매번 선두주자를 지켰던 엄마는 최근 10년 만에 수영장에 다시 나가신다. 오랜 기간 쉬다가 수영을 다시 하려니 벅차고 힘들다는 엄마의 얼굴엔 생기가 감돈다. 이젠 열 명 중 4번째라며 오래 쉰 만큼 실력이 회복될 때까지 계속 연습하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다. 엄마의 단단함이 눈부셨다. 엄마는 결코 내게 현실을 회피하는 나약함을 물려주지 않으셨다.
 
어릴 적 경직된 가정환경 탓만 해오다가 결국은 모든 것이 내 선택이었음을 인정한다. 주변 환경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니 다음은 고질적인 사고방식과 선천적으로 답답한 기질을 가진 나 자신을 탓하게 된다. 이제야 그동안 고르지 않았던 선택지를 살펴보려 해도 관성의 법칙에 따라 쉬운 선택으로 또다시 돌아온다. 난 여전히 답보 상태에 빠져있다.

정도(正道)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나의 선택이다. 평생 짊어지고 갈 자괴감은 더불어 수반된다. 나 자신에게 반문해본다. 과연 최선을 다해 선택했나.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내버려 두고 있지 않나. 내 인생을 진심으로 아낀다면 지금까지의 잘못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되는 대로 쉽고 편한 길만 고집한다면 짐승의 삶을 선택한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성자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 않다. 더이상 주변 환경과 나 자신을 탓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옆에 남아 있는 옳은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난 나의 태도를 결정하고, 나의 길을 선택하는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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