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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셋 Nov 25. 2019

당신은 오지랖을 어디까지 허용하시나요?

겉옷의 앞자락의 길이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


 오지랖의 사전적인 의미이다. 현대 사회에서 오지랖은 대게는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지랖이 부정적인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뜻에 따르면 옷의 앞자락이 넓어서 몸이나 다른 옷을 감싸게 되는데, 이것은 따뜻한 느낌을 준다. 요새 유행하고 있는 옷들만 봐도 이를 증명해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을 넘어 '롱 패딩'이 유행하고 '오버핏'이 유행하는 중이다.


 하지만 롱 패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옷을 딱 맞춰 입는 것을 좋아하고 짧은 옷을 즐겨 입는 사람들이 있듯이 패션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신체에 걸쳐서 입는 옷 조차 이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음의 오지랖'의 허용 길이를 아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짧은 옷을 좋아해서 앞자락의 옷이 다른 부분을 덮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많이 덮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무릎까지 오는 길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몸을 폭 덮는 롱 패딩 수준의 옷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의 허용 길이는 드러내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선을 지키는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난 무릎 정도의 길이나 적어도 적당한 길이를 선호하는데 상대는 짧은 길이만을 선호하면 관계를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과 교류를 중시하는 사람이 친밀한 관계가 되려면 서로 노력하거나 한쪽이 완전히 맞추려고 해야 한다.


 서로 선호하는 옷의 길이가 달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서운하거나 불편하게 되는 관계도 많다. '난 이 정도 거리가 필요해.'라고 미리 말하고 다니면 좋으련만 인간관계를 시작할 때 그러기는 쉽지 않아서 끊임없는 눈치게임을 통해 절충적인 선을 만들어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옷의 길이는 없다.



   서로의 허용 옷자락을 맞추려고 눈치게임을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도 모르게 남에게 부담을 주는 때가 있다.


 내가 예전에 만난 친구가 그랬다. 난 무릎 정도의 오지랖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발에 채일 정도로 길지도 않고,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하지만 몸을 딱 감싸주는 그 길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상대에게 "밥은 먹었어?" , " 잘 잤어? , " 언제쯤 끝나? 이따가 만나서 밥 먹고 같이 공부할까?"와 같은 일상적인 질문을 묻는 것을 좋아한다. 이는 상대에 일정에 대해 내가 잘 기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애정 방식이다. 상대가 좋아서 상대의 일과가 궁금하기 때문에 종종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정도의 질문은 가깝지 않은 관계나 이런 질문 자체에 답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에게는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대게는 적당한 오지랖의 범위로 물어보고는 한다. 상대의 일과를 하나하나 캐묻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 대게는 12시 다 되어갈 때쯤 지난밤에 하던 카톡에 이어서 잘 잤거나 회사에 잘 갔냐는 식으로 물어본다.


 그래서 간과했다. 이 정도는 어느 정도 친한 관계에서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은 옷의 앞자락이 짧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짧은 옷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길이도,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옷도 갑갑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 것이다. 사소한 일상의 관심을 묻는 오지랖부터 만약 그 이상을 넘는 오지랖은 갑옷같이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 답답한 옷을 입어보라고 하는 정도였으니, 상대는 어느 날 이렇게 말을 했다.


" 네가 날 생각해서 그런 거는 아는데, 자기는 네가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부담스러워." "내가 늦게 일어날 때도 있고 어디 가서 공부를 하던 뭘 하던 내 자유인데, 네가 자꾸 물어보니깐 그게 힘들더라."


아뿔싸. 눈치게임에 실패해버린 것이다. 짧은 옷을 선호하는 상대에게 너무 긴 옷을 입으라고 내가 강요해왔던 것이다. 적당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에게 맞는 오지랖의 길이는 없었다.


정답인 옷의 길이는 없다.



 살짝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가끔 물었고 강요를 한 적도 없었으니 적당한 선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가 불편했으니 변명 따위 없이 사과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부담스럽게 하려고 나쁜 마음으로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랬다니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정말 조심하겠다."라고 사과를 했었다. 상대의 마음을 잘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답인 옷의 길이는 없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여 선을 조정하고, 짧은 오지랖이나 긴 오지랖이나  어느 한쪽이 한쪽을 옳지 않다고 할 명분이 없다. 둘 다 정답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오지랖을 지켜야 할까



 모두에게 맞는 오지랖도, 정답인 오지랖도 없다. 요새 레트로 감성이 일고 응답하라 1988이 광풍을 일으켰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 감성을 좋아하고 그리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경계 없던 시절이, 그 정이 넘치는 시절을 싫어한다.



 난 무릎까지 오는 오지랖을 부려주는 사람이 좋지만, 상대는 아닐 수 있다. 이 눈치게임을 하는 것이 힘들어서 어떤 선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 의문이 든다면 뭐니 뭐니 해도, 적당한 길이가 좋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대에게는 사적인 잦은 연락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친밀감이 생긴 후에 일상을 묻는 것이 좋고, 일상적인 부분을 넘는 사적인 부분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아무리, 옷의 길이가 어떠하던 자유라지만, 우리가 입는 옷도 TPO :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 을 지키듯이 너무 지나친 간섭도, 그렇다고 너무 기계적인 관계로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여야 한다. 그래야 나의 오지랖의 허용 범위도 존중받을 수 있다.



내 오지랖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버려라.


 짧은 것부터 긴 것까지 오지랖은 다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자기만의 공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도, 누군가를 많이 감싸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다 옳다.


 그러니깐, 혹시 눈치 게임에 실패하더라도. 그 점을 인지하면 덜 상처 받고, 덜 상처를 주게 된다. 서로의 길이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길이가, 오지랖의 허용 길이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 오지랖을 존중조차 하지 않는 자는 마음속으로 버려라. 여기서 말하는 버리라는 것은, 마음을 더 이상 많이 쓰지 않게 조절하라는 것이다.


 가령, 눈치게임에 실패했다고 자신은 옳은 데, 네가 이상한 거라고 몰아가는 부류들을 말이다. "넌 이상해. 넌 진짜 사람을 불편하게 해. 네가 이상한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메신저를 고작 몇십 분 보지 않았다고 상대를 옭아매는 것은, 억압하는 게 맞고 상대가 잘못한 게 맞다. 그리고 상대와 상대가 교류하는 데 최소한의 마음조차 쓰지 않는 것도 상대가 잘못한 게 맞다. 


 최소한의 TPO 지켜야 한다. 상대의 마음에 최소한의 응답은 해야 하고, 상대의 마음에 혼자 설 자리가 없이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런 TPO를 지켰는데도, 상대가 " 주변은  그러는  너만 이상해."라는 식으로 몰아간다면 그건 상대의 잘못이다. 그저 오지랖이 맞지 않으면, 그런 오지랖은 서로 조심하고 적당한 선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한 번 말했는데도 계속 자신의 오지랖을 강요한다면 문제지만, 그 '조정 기간'에 상대의 오지랖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니 버려라.


 최소한의 TPO 갖춘 오지랖은, 어떤 길이라도 정답이다. 서로 다른 옷을 입었다면  간격을 맞추면 된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사적인 마음을 쓰려고 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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