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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h Feb 24. 2022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2

그렇게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형을 가진 것 중, 영원한 것은 없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에는 영원이 없다. 죽음, 곧 형의 소멸은 어디에나, 어느 것에나 반드시 있으니까. 그렇다면 영원이라는 단어는 대체 무엇과 함께 쓸 수 있는 단어인가. 우리는 무엇을 영원하다 할 수 있는가.


어느 날, 내게 비수처럼 꽂힌 문장이 있다. 진리로 믿고 있는 책의 문장이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고린도후서 4:18

그 문장은 내게 불꽃처럼 새겨졌다. 촛농처럼 깜깜이 굳은 듯했다가, 작은 온기에도 금세 타오르곤 했다. 일렁이다가, 흩어지다가, 흔들리다가, 잠잠해지는 불꽃. 보이지만 잡을 수는 없는 불꽃. 그것은 어떠한 형이 없는 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열은 분명히 실재한다. 일렁이고 흩어지고 흔들리면서도 실재한다. 마치 영원처럼.
 


내게 있는 영원은 그런 것들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은 채로 어느 순간 내게 쌓여 나를 만들어 간 것. 쉽게 말하자면 “생각, 기억, 마음”같은 것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각, 기억, 마음”이 가진 “의미”. 몰두하게 된 생각, 문득 떠오른 기억, 시시 때때의 감정을 일으키는 마음. 그것들이 내게서 일어난 이유들을 나는 “의미”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 무형의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마다의 이유, 즉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되도록 오래 붙들어두고 싶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는 나의 의미들에게 나는 형을 만들어 주었다. 활자로, 선으로, 색으로, 장면으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잊혀져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나의 방법으로 기록된 의미들은 내게 오래 남아 영원으로 쌓여갔다.  


그러나 영원을 쌓는 일을 나는 언젠가부터는 하지 않았다. 각박히 돌아가는 현실의 삶에 휩쓸려 당장 닥쳐오는 실체가 있는 것들에 눈을 빼앗기고 귀를 빼앗기고 말았다. 실체 없이 영원할 그것들의 아우성을 외면한 채 한참을 살았다. 먹고사는 게 먼저라는 변명이 있는 탓에 진짜 나 같은 나로 살 수 있게 하는 영원들에게 무심했다. 아, 그래서였다. 나의 영원들을 외면한 탓에 나는 일상에서 그렇게나 괴로웠다. 의미들을 자꾸만 잊고, 잃어갔으니.


오두막의 문장이 촛농으로 잠들어있던 영원을 향한 내 열심을 깨우는 온기가 되었다.

“영원한 건 없지만, 내가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결국 영원으로 남습니다.”

그래, 내가 주목했던 보이지 않는 것의 영원을 다시 되찾아야만 한다.

그렇게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선셋이란 이름으로.


ps. 안녕하신가요, 지난여름 꽃신 오두막에 머물다 간 당신. 덕분에 나의 영원이 다시 쌓여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안녕했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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