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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Jun 28. 2021

난 괜찮지 않아

전혀 괜찮지 않다고.

공기가 희박하다. 숨이 가쁘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뛴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하고 가슴을 쳤다가 뛰지 않는 듯이 조용해졌다가를 반복한다. 두려움에 네이버 의학상식을 뒤적여보지만, 정신적인 문제인지 신체의 문제인지 알 수가 없어서 두렵다.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던 TV 속 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라 그 두려움에 또 숨이 가빠온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습관적으로 "난 괜찮아"를 되뇌었던 것이.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시작은 아마도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발달이 느렸던 친구, 작은 키, 어눌한 말투, 항상 맨 앞줄에 앉아있던 그 힘없던 아이는 우리 반에서 가장 인기 있던 예쁜 부잣집 아이에게 줄곧 괴롭힘을 당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주변 친구들은 웃었고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는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배시시 웃는 것이 전부였다. 그 꼴을 보는 게 못마땅했던 나는 그만 좀 괴롭히라고 말했다. 우리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아이에게 잔소리라니, 도전이라니. 그 아이는 나를 멀리하자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했고, 친구들은 그 명을 받들어 썰물처럼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도시락을 혼자 먹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난 상관없어. 난 괜찮아. 난 올바른 일을 했고 잘못한 게 없잖아. 난 떳떳하다고.'

과연 나는 괜찮았을까. 고작 열세 살에 혼란스러움과 민망함과 자존심을 가슴에 묻고 혼자 도시락을 먹던 그날의 나는.


고등학생이 된 나는 기숙사에 들어갔다. 주말에 집에 가면 엄마가 학교 가서 먹으라며 토스트를 싸주신다. 힘든 고3 자율학습 시간에 엄마가 싸주신 토스트를 먹는 게 얼마나 힘이 나는 일인가. 그러나 여지없이 뒷자리 친구가 토스트 좀 달란다. 힘들고 예민한 고3, 게다가 배고픈 고3, 엄마가 보고 싶지만 기숙사 생활을 참으며 지내는 고3 여학생은 늘 얻어먹기만 하던 뒷자리 친구의 "나 토스트 좀 주라" 한 마디에 서러움이 복받쳤다. 늘 나눠먹었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나 지금 엄청 힘든데 엄마가 싸준 토스트 먹으면서 간신히 힘내고 있다는 속마음은 말하지는 못했다. "아 미안, 나 지금 너무 배고파서. 미안". 난 예상하지 못했다. 나눠주지 않은 토스트의 후폭풍을. 뒷자리 친구는 화가 났고 난 맛있는 걸 혼자 먹는 애가 되었다. 힘든 고3 생활에 그 친구의 폭풍 같은 노여움은 나에게 더한 스트레스를 줬다.

'너도 배가 고팠겠지, 근데 내가 여태껏 정말 많이 나눠줬잖아. 너도 매점 가서 사 먹을 수 있었잖아. 근데 너는 항상 나눠달라고만 하잖아. 지금까지 나눠준 음식들에 대한 고마움은 잊은 채 토스트 한 입에 노여움이라니. 난 너의 노여움을 풀어주고 싶지가 않다. 네가 화가 나도 어쩔 수 없다. 난 상관없어.'

과연 나는 괜찮았을까. "내가 지금까지 너 진짜 많이 나눠줬잖아! 거참 너무하네"라고 억울한 속내를 큰 소리로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을까.


승무원이 된 나는 힘든 비행을 마치면 집으로 데려다주는 직원 셔틀을 바로 타지 않았다. 건물 뒤편 벤치에 가서 앉아 어둠이 깔린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시니어에게 억울하게 혼이 나도, 승객에게 말도 안 되는 컴플레인을 받아도, 각종 상황에 자존심이 바스러져도 나는 고개 숙여 사과할 뿐 변명은 하지 않았다. 벤치에서 흡연을 하던 승무원들의 매캐한 담배 연기를 온몸에 뒤집어쓰고서야 난 괜찮다고 되뇌며 자리를 뜬다. 남자 친구에게 전화해서 나 오늘 힘든 비행을 했다고 위로를 받거나, 엄마에게 전화해서 목소리를 듣고 위안을 삼거나 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남자 친구가 없었다... 그렇게 그 힘듦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았다. 이 비행이 끝나면 다시는 안 볼 확률이 높은 승객들과 타국적의 시니어 승무원들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난 괜찮다"라고 되뇌며 스스로 치료했다.


고위험군 산모로 병원에 입원한 채 임신 기간의 반을 보내야 했다. 옆에 누운 산모들이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갈 때마다 어둠 속에 숨죽여 손을 떨며 기도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중요한 회사 일이 생기면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외출증을 끊어 회사 업무를 봤다. 의사에게 나는 괜찮을 거라 했다. 전혀 무리하지 않을 것이고 많이 걷지도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사실 난 전혀 괜찮지 않았다.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도 이미 괜찮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걸어 나와 회사 일을 처리했지만 몸상태는 전혀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 내 마음 상태는 더욱 좋지 못했다. 회사는 중요하니까, 이 일은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난 괜찮다고 하는 내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다.


회사를 운영하며 감내했던 쓰나미 같은 스트레스와 심적부담 속에서도 난 그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 고되다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모두가 나에게 와서 힘듦을 토로하고 힘을 달라, 용기를 달라고 했다. 그들을 위로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넌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휴가를 주며 좀 쉬라고 했다. 집에 가보니 아이를 봐주는 시터 이모님이 손목이 아프다며 허리가 아프다며 자신의 힘듦을 알아봐 주기를 기대한다. 너무 고생하셨겠다고, 오늘은 어서 들어가서 쉬시라고, 아이 밥도 제가 하고 집 정리도 제가 하겠다고 말하며 등 떠밀어 보내드린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쉴 새 없이 챙겨야 했지만 내 마음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다들 나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넌 요즘 힘들지 않니"라고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그게 이상하다고 여기지 못했다. 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서 이런 상황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설명해주고 그리 굳게 믿었다. 그런데 왜 일까. 어느 순간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심장이 미친 듯이 제멋대로 뛰어버리는 그런 증상은 왜 생겼을까. 난 이토록 괜찮았는데 말이다.


정신의학과를 가고 심장클리닉의 진료를 받았지만 어떠한 이유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답은 나 스스로가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생각해본다. 나 지금 왜 이럴까.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나, 정말 괜찮은 걸까. 


솔직히 마주한 나 자신과 오랜 대화를 나눠본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나는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아 왔다. 이렇게 지내면 앞으로도 괜찮지 않을 것이다.


자존감이란 뭘까. 나 스스로를 믿고,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의식이다. 내가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고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내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이를 극복할 수 있었을 테다. 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힘듦을 모른 척해서도, 아닌 척해서도, 괜찮은척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괜찮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괜. 찮. 아. 야. 했. 다.


단 한 명에게라도 솔직했어야 했다. 내가 이런 상황이고 힘들지만 잘 이겨내고 있다고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하고 털어놓을 수 있어야 했다.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에게라도 솔직했어야 했다. 안 힘든 척, 괜찮은 척 남들을 속이고 살다 보니 어느샌가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싸한 가면을 쓰고 모두를 속일지라도 나 자신까지 속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비록 죽을 만큼 힘들지만, 난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응원해주는 것으로도 충분했던 것이었다. 난 괜찮아, 전혀 문제없어, 이 고통은 고통도 아니야, 다들 이런저런 힘듦을 업고 살잖아 라고 생각하며 내 아픔을 모른 체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까지 속이다 보면 세상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괜찮은 척이 모여 강물이 되고, 나는 내가 만든 가면을 쓰고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다.   




회사를 떠나서 시간이 많은 나는 요즘 동영상을 보면서 요가를 한다. 그러다 발견한 명상이라는 동영상을 무심코 클릭해본다. 바른 자세로 앉아 심호흡에 집중을 한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을 한다. 날숨과 들숨에 집중한다.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날아다니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호흡에 집중을 하다 보니 무엇이 보이는가. 내가 보인다. 과거에 나를 괴롭혔던 마음들이 내가 만들어낸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적당히 솔직하게 살았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다 내 손에 달려있었던 것이고 내가 만든 결과였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난 요즘 웃음이 늘었다. 혼자 노래도 하고 신이 나면 춤도 춘다.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다 보니 아이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아이의 표정과 말투, 나를 꼭 빼닮은 눈썹과 오물거리고 밥을 먹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소중함을 느낀다. 난 앞으로 괜찮음으로 나를 포장하고 살지 않겠노라 다짐을 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을 아이에게도 서서히 가르쳐주려고 한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이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나갈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 마음에 솔직하고 감정 표현을 아끼지 않는 풍부하고 윤택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함을 아이가 알았으면 한다. 엄마가 힘들게 얻은 이 깨달음이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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