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set Lounge Aug 16. 2021

야, 너도 걔랑 놀지마!

카톡 메시지 쓰는 게 제안서 작성보다 어렵다. 짧은 메시지 하나를 쓰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단어를 고르고 바꾸며, 마침표를 물결무늬로 바꾸면서 글을 다듬었다. 나는 지금 입찰 프레젠테이션 장표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이력서를 쓰고 있는 것도, 제안서나 계약서를 쓰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아이 친구의 엄마에게 보내는 카톡 메시지를 쓰고 있다.


난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톡 보내는 게 이렇게 힘들일이었던가. 카톡이란 엄연히 공적 영역을 벗어나 나를 아는 이들로 이루어진 인물 리스트 중에서 내가 원하는 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가볍고 경쾌한 채널이 아니었던가. 


비즈니스 문서들은 수치와 날짜만 잘 보면 되었고, 우리 회사 손실 없도록 계약서 꾸미는 일이야 프로젝트 성격과 상황에 따라 템플릿에 반영하면 될 일, 업무 중 이슈가 있다면 사실 관계, 전후 사정, 맥락에 따라 잘잘못을 따지면 될 일이었다. 그게 어렵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알고 보면 이토록 담백한 일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나 같은 성격의 사람은 이와 같은 공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정말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은 수십억 대 프로젝트를 놓고 갑론을박을 따지는 대화가 아니라, 서로의 자식을 두고, 서로의 자식 간에 발생한 일에 대해 논하는 대화였다. 너와 나에 관한 것이 아닌, 우리 회사와 너의 회사가 아닌, 너의 아이와 나의 아이에 관한 대화. 정황만 알고 있을 뿐 실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한 것인지, 어떤 뉘앙스가 오고 갔는지 엄마들은 모르는 상황에서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며 이어 나가야 하는 대화. 또는 상대 아이의 문제점을 내가 목격했고 상대 아이의 엄마에게 주의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행여 그 엄마의 기분이 언짢을까 마침표를 스마일 이모티콘으로 바꿔봤다가 너무 가벼워 보이나 싶어 물결무늬로 바꿔본다. 대부분 예측 가능한 비즈니스 시나리오 속에서 살아온 나는, 아이라는 주제로 예측 불가능한 대화의 시나리오를 무수히 상상하며 대화에 임한다. 


아이가 대화의 주제가 된 이상, 나는 주의에 주의를 기울인다. 혹시나 발생 가능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표현을 다듬고 사실 여부를 다시 한번 체크한다. 카톡 대화창에서 최대한 나의 진심을 호의적으로 전해보고자 쓰지도 않던 이모티콘까지 써가며 메시지를 순화하고 둥굴려 표현을 다듬어본다. 


감정을 전혀 실을 필요가 없던 회사체(회사에서의 대화법)가 그리워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카톡을 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써 내려가며 체한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길게 써 내려간 내 카톡에 너무 건조한 답변을 받고 보니 이게 뭔가 싶다. 역시 사람은 예의를 차려 돌려 말하면 이해를 못하는 것인가. 


나라는 사람의 대화법이 아닌, 아이의 엄마로서의 대화법을 익히는데 조금 더 수련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가 밖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을 하는지, 이기적이고 배려심 없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다른 아이를 배척하거나 다른 아이가 속상할법한 말투를 쓰는 것은 아닐지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 듣는다. 조금이라도 반듯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자기 전에 아이에게 문제를 지적하고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다. 너무 배려심을 강조하면 다른 아이들의 마음만 챙기다가 결국 자기주장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될지 몰라 서로에 대한 존중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내 교육관이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허나, 모든 아이들의 성향과 기질이 다르듯 엄마들의 교육관과 가치관도 다르기에 내 아이는 늘 "다름"을 마주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내 아이의 엄마로서 다른 아이의 엄마와 대화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너무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상대에게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이틀 전 놀이터에서 마주한 남자아이와 엄마의 대화는 이러한 교육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엄마, xx가 나랑 안 논대!" 

"야! 그럼 너도 걔랑 놀지마!" 

그 엄마는 내 아이의 친구가 왜 내 아이와 안 놀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았을까? 내 아이가 친구를 불편하게 했거나, 아니면 친구가 이유 없이 내 아이를 배척하는 것은 아닐지 알고 싶지는 않았던 것일까. 너도 걔랑 놀지 말라는 말 대신, "속상했겠구나"라며 아이의 마음을 먼저 달래주고 싶지는 않았을까. 


내가 알고 지내는 동네 엄마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좀 쿨해서요" 

평소 아이가 위험하게 놀아도 그냥 지켜보고 다른 친구에게 과격한 언행을 하거나 배척하는 행동을 하는 것도 지켜보기만 하는 그 엄마는 본인을 "쿨한 엄마"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사람은 이렇게나 다르다. 


이 많은 다름 속에, 훌륭한 가치관으로 아이를 올바른 길로 성장시켜온 엄마들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요즘 새삼 느낀다. 내 자식을 바른 성품을 지닌 아이로 잘 키워내는 것만으로도 세상살이 꽤나 성공한 것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난 괜찮지 않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