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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Aug 28. 2021

[직장인의 하루]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무슨 일을 하고 사나요?

10년 전, 강남역 근처를 운전하던 중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남편은 "차가 퍼졌다"라고 표현했다. 더 이상 운행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란다. "차가 퍼졌다"라니. 재미있는 표현이군.


10년 후. 도로 한가운데서 멈춰버렸던 그 차처럼 나도 어느 한날 멈춰버렸다.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퍼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 소모를 많이 하고 살았다.

하루에 300명이 넘는 승객을 만나는 승무원일 때도, 매일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했던 호텔 근무 시절에도, 수많은 직원들과 고객들, 파트너사까지 관리하면서 매일 예기치 못한 이벤트들을 겪던 회사 운영 시절에도, 평온했던 얼굴 뒤 내 감정은 늘 요동쳤다.


감정이라는 것도 정해진 양이 있는 것 같다. 감정이 소모되면 다시 채워줘야 하는데 채워지지 않고 닳기만 하니 논바닥 갈라지듯 바짝 말라 애초부터 감정이란 것이 없었던 것인 양 공허해지는 것이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피플 스킬과 설득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는 평가에 익숙했다. 사람을 상대하는데 익숙하고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대부분 힘들이지 않고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었으며 입찰을 할 때도 대부분 피칭에 성공했다.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힘든 직원을 달래고, 고객의 분노를 잠재우고, 파트너사를 설득하면서 하루 종일 말을 하고 있는 날이 많았는데 그 대화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내가 의도했던 대로 흘러갔지만, 한편으로 그 대화들은 대부분 나와는 다른 사고방식, 개념, 상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는 서서히 지쳤다.


말이 하기 싫어졌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들을, 또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설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소통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 삶을 돌아보고, 내 가족을 바라보고, 내 마음을 돌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했던 일들을 조용히 돌아보고, 걸어온 길마다 떠오르는 행복했거나 아픈 기억이 있다면 글로 적어가면서 나는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지만, 반장선거 때가 되면 꼭 후보로 나가서 공약을 하고 반장 배지를 달았다. 매우 한정된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선호하지만, 지금까지의 직업을 돌아보면 다수를 상대하는 직업만을 가지고 살아왔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오게 되었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진짜 나의 모습이 뭔지 모르겠는 와중에도 감쪽같은 가면을 쓰고 치밀하게 훈련된 네트워킹 스킬로 살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잘하게 된 일>을 하고 살다 보니 진정으로 내 정신을 채워주는 성취감은 느끼지 못한 채, 일 잘하고 돈 좀 제법 버는 껍데기로 살아왔던 것이다.


내 마음을 옥죄어왔던 환경을 벗어난 지금, 나는 누구와도 감정 소모를 하지 않고 지낸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습관적으로 반사신경이 작동하기도 하지만 내버려 둔다. 내가 대화하고 싶은 이들과만 대화할 수 있는 자유를 이제야 느끼고 산다. 타인의 억지소리에 의무적인 대꾸를 하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잘하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아쉽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세상을 배우기도 하고, 소통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경험이 누군가의 마음에는 닿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글로 남겨보기도 한다.


지치고 힘들 때 불필요한 소통을 줄여보는 것이 나에게는 꽤나 좋은 방법이었다. SNS를 하지 않고, 날 선 대립이나 이견을 마주해야 하는 사회생활을 잠시 쉬고, 마음을 함께 하는 진정한 관계가 아닌 자들을 끊어냄으로써 여유롭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써보고, 아크릴 물감으로 해변을 그려보면서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마음의 단비가 되어 내 감정을 다시금 움직이게 했다.


매일 마주하는 일상생활에 확신이 서지 않고 의구심이 든다면, 내가 왜 이 출근버스에 타고 있는지,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 일단 잠시 쉬는 거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금 내 마음은 어떤지, 만족스러운지, 내 삶과 정신은 풍요로운지, 잠시 쉬면서 생각해보는 거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 40되고 50되면 얼마나 억울한가.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 <의도적인 쉼>을 한번 누려보는 것, 진정한 호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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