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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Aug 16. 2021

[직장인의 하루] 어서와 퇴사는 처음이지


사직서

퇴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사직서를 썼다. 흔히 사직서라고 하면 한장짜리 A4 용지에 일신상의 이유로 어쩌고, 그동안 고마웠고 어쩌고 하는 내용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의 경우, 내 회사의 조직 특성과 내 역할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해야할까, 한장짜리 사직서로 될리 만무했다. 그래서 우선 이메일을 썼다. 쓰다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오랜 기간동안 내가 이렇게 일을 했구나, 이런 성과를 만들었구나, 이런 어려움이 있었구나, 그렇게 완성된 나의 이메일 사직서. SEND 버튼 위에 마우스를 올리고 몇번을 고민했을까.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한테 눌러? 눌러? 진짜 눌러?를 세 번 물어보고서야 에라 모르겠다라며 SEND 버튼을 눌렀다. 정성스럽게 작성한 사직서와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회사는 나에게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며 STAY를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떡밥을 물었다. 아직 덜 힘들었던 것. 


수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사직서를 쓴다. 이제는 조건을 제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사유로 무장한 사직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나의 사직서는 수리가 되었다. 



인수인계 

이제 인수인계다. 직원들의 인수인계는 보통 한달의 여유를 두고 진행된다. 진행 중인 업무를 대무자에게 인계하고 함께 업무를 수행해보며 부연 설명을 해주고 새로운 담당자가 혼자 무리 없이 업무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시간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한달 말미를 두고 퇴사하는 것은 아니다. 계약서 상에 한달 전 통지라고 되어 있지만, 채용하는 회사 입장을 생각해본다면 한달 후 입사가 가능한 사람보다 즉시 입사 가능한 사람을 선호할 터, 이직을 하고자 하는 직원들은 2주 정도의 기한을 두고 퇴사를 한다. 이들에게 한달을 지키라고 종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낳기에 가급적이면 수리를 해준다.  


그럼 나의 인수인계는 어떠한가. 회사 대표가 회사를 떠난다는건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기에, 총체적인 인수인계를 세 달에 거쳐 진행했다. 회사 경영 방안과 향후 리소스 관리, 영업 관리, 매출 관리 방안 등에 대한 뭐랄까 제안서를 닮은 로드맵을 작성하고 연일 최고경영자 및 주요 디렉터들과 미팅을 수도 없이 했다. 떠나는 마당에 무슨 운영 전략이며 제안서냐 하겠지만, 앞으로도 근면하게 일을 해나갈 남은 직원들을 위해 여느때보다 고심하여 작성했다. 퇴사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사직서 수리 후 남은 시간이 빨리 가던가? 아니다. 정말 느리게 간다. 그렇게 더디게 흘러가는 세 달을 보냈다. 

  


마지막 근무일, 퇴사일. 

드디어 오긴 오는구나, 마지막 근무일. 이 회사에 소속되어 살아온 무수한 나날들. 오늘이면 나는 무소속이다. 퇴근 시간 6시 정각이 되었지만, 지난 세월도 그래왔듯이 나는 오늘까지도 야근을 한다. 그렇게 업무를 종료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폰에서 아웃룩을 삭제하는 일이었다. 핸드폰 우측 하단에 자리하고 있던 아웃룩 버튼. 보고 싶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클릭했던 업무 메일들, 누를때마다 또 어떤 사건사고가 나를 기다릴지 몰라 가슴을 조아려야했던 그 버튼. 난 그렇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워라밸을 지키지 못한채 영리하지 못하게 일을 해왔기에 결국 이 파국을 맞았다. 아웃룩을 삭제하자 휴대폰 어플 레이아웃이 휘리릭 바뀐다. 앓던 썩은 이를 뽑은 기분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나를 억누르고 짓눌렀던 그 스트레스의 배양소, 아웃룩을 지우고 나자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이제 핸드폰은 전화라는 본연의 일을 하겠지. 일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바라볼 일은 없겠지.  



아침 10시, 가장 치열한 시간, 가장 미팅이 많은 시간. 

지금 나는 앉아서 글을 쓴다. 나는 왜 그 회사의 그 직책을 짊어지고 살아온것일까. 조금만 더 용기를 갖고, 더 현명했다면 그 오랜 시간을 가슴에 응어리를 담은채 살아오진 않았을텐데. 떠나고 나서 바라보니 나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의아하다. 난 이제 그동안 하지 않던 운전도 많이 하고, 주린이를 탈피해서 주식공부도 한다. 월급을 잃었지만 그만큼 쓰는 돈도 엄청나게 줄었다. 씀씀이가 달라졌고 절약이라는 것도 하고 산다. 내가 독하게 버티며 살아왔던 것이 내 사회적/경제적 "성실"과 "책임감"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나는 왜 가사와 남편과 아이에게 책임과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내 모습은 눈가리고 모른 채 살아왔던걸까. 



퇴사의 경험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세상은 쉽지 않고 쓴맛도 많이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도전이 없다면, 나를 힘들게 하던 이 조직을 떠나 맛볼 수 있는 의외의 행복과 또다른 능력의 발견은 영영 하지 못했을테다. 최선을 다해왔다면, 그리고 감내할 수 없는 지경의 힘듦을 짊어지고 있다면 한번은 꼭 그 굴레를 벗어나 다른 세상, 다른 조직, 다른 사람, 다른 열정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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