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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Nov 08. 2021

갑질, 그 하찮음에 대하여

우리는 갑이자 을로, 때로는 병이자 정으로 살아간다. 장소와 상대에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다양한 역할을 하며 산다. 언제 어디서나 갑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갑질을 하는 이들은 언제까지나 자신이 갑이라고 여기고 애처롭게 한심한 짓을 하지만, 세상은 어느 정도 공평하기에 그들에게도 비참한 말로는 있다.


내가 운영했던 회사는 다수의 고객을 상대했다. 주 고객은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기업들이다. 기업의 이름을 방패 삼아 무례한 행동을 하고 기업의 힘이 곧 자신의 힘인 양 권력을 자랑하는 알량한 자신감을 가진 자들을 꽤나 경험했다.


20여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갑들을 경험하며 쌓인 나의 빅데이터. 제법 신뢰할만한 이 데이터에 따르면 그들의 행동 패턴은 이러하다.


상대에 대한 기본 매너의 부재

첫 만남에 정중한 인사나 명함 교환을 하는 스킵하는 것은 상대가 을이라서 선택적으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못 배워서인가. 인사는 최대한 무심하게, 고개만 까딱함으로써 갑으로서의 강렬한 첫인상을 완성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관계에 대한 기본 매너조차 없으니 그냥 "동물"인가.


갑스러운 어투 -갑투- 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이메일을 쓰면서도 "갑"스럽게 표현을 다듬는다. 이메일 서두에 인사는 사치다. 문장은 "해주십시오"가 아닌 "하라"로 명령어를 구사하며, 상대 직급 나이 불문하고 말이 짧다. 인사도 못 배운 것 같던데 존대도 못 배운 것 같아 애처롭다. 그들의 어투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갑투"라고 하면 적절할 것 같다.


난 아무 말도 안 해줄 테니, 내 의도를 간파하라.

"내가 돈 주면서 이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나. 내가 업무를 상세하게 요청하지 않아도 네가 알아서, 눈치껏, 내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여, 업무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갑 내부적으로 결정도 안된 일을 최소한의 가이드도 없이 일단 던져놓고 기껏 급하게 완료해주면 "내 의도는 이게 아니었다"를 시전 하는 자들. 

"그 의도", 처음부터 있기는 했었던가. "그 의도", 처음부터 알려주면 안 되는 것이었나.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내가 우선이므로.

퇴근을 10분 앞둔 5시 50분에 메일을 보내서 내일 오전 9시까지 보내달란다. "내가 오늘 업무 요청 많이 안 했고 이거 하나 보낸 건데 그것도 못하느냐, 이게 그리 오래 걸릴 일이냐"라고 역정을 낸다. 역정을 내면 마지못해 요청을 들어주니 다음에 또 무리한 요청을 하고 또 억지소리를 하며 화를 내본다. 안 해줄 것 같으면 마지막 보루로 인신공격을 시작한다. 경력자 맞느냐, 내 말을 이해는 하느냐, 이것밖에 안 되냐, 뭐하는 사람이냐 등의 공격을 퍼붓고 급기야 IC 소리도 내뱉던 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가 있는가? 떠오르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런 자들과 일을 하고 있다면, 매일 마주해야 하고 상대해야 한다면, 일을 하면서 매일같이 자괴감에 빠질 것이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갑질을 하는 갑의 모습이 처음에는 낯설다가, 너무 뻔한 레퍼토리로 반복되니 짜증이 났다가, 이후에는 그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을 달리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장소와 상대에 따라서 갑이 되었다가 을이 되는 삶을 산다.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이 이직해서 우리 회사의 갑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객의 갑질에 유독 격분하던 그 직원은 "고객이 매너와 상식이 없고 인간이 덜됐다"라고 투덜대다가 어느 날 이직을 하여 갑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시작된 그의 "갑투". 갑이라는 위치는 무슨 전염병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주 지독한 갑질로 업계에서 유명한 또 한 명의 고객은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우리 직원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우리의 잘못으로 일을 그르쳤다고 본인의 윗선에 거짓 보고를 했다. 전형적인 갑질의 행동유형을 다 보이고 짜증과 화가 많은 그녀였기에 도대체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가능한가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명한 인플루언서의 인스타그램에서 그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사진 속 그녀는 "주변인을 사랑하는 선량하고 천사 같은 사람"이라 불리고 있었다.


내 모습을 돌아봤다.


나도 갑이 될 수도 을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은 갑질 또는 비매너의 주인공이었을 수도 있다. 


한결같이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사람.

그런 어른이 되고자 한다.


이 세상엔 짓밟고 상처 줘도 되는 그런 사람은 없다. 

하찮은 갑질로 우월감을 드러내며 으시대는 그런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지 않고, 선함으로써 세월을 보낼 수 있는 참 어른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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