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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Dec 14. 2021

아이 덕분에 사는 두 번째 인생

아이의 선물

공룡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시기가 언제인 줄 아는가?


바로 내가 다섯 살일 때와, 내 아이가 다섯 살일 때라고 한다.


나는 내가 안킬로사우르스와 스테고사우르스의 차이점에 대해 검색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릴 때 보던 마징가제트가 내 인생 마지막 로봇인 줄 알았는데, 헬로카봇에 등장하는 모든 변신로봇의 이름을 다 외우게 될 줄은... 그것들을 내 손으로 조립하게 될 줄은... 그리고 그 로봇을 하늘 높이 쳐들고 신명 나게 역할극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정말 로봇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던 독서광 어린이였는데.

 

출처 불분명하지만 너무 팩폭인 이미지


전업맘이 된 지 일 년 여가 된 지금, 나는 인생을 두 번 살고 있다.




내 아이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데 원장님이 무섭다며 학원 가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 꽤나 피아노를 오래 쳤던 나는 내가 직접 가르쳐볼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지만, 내가 치는 것과 아이를 가르치는 방법은 꽤나 다를 터, 며칠을 주저하다 결국 피아노 학원을 끊고 엄마표 피아노를 시작했다.


사실 나는 피아노를 오래 쳤지만 당시 손가락 번호를 잘 이해하고 치지는 못했기에 아이를 가르치려면 손가락 번호부터 다시 습득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튜브로 유아 피아노 영상을 보면서 공부를 했다. 아이의 현재 실력에 맞게 유튜브에서 티칭 방법을 배워서 아이에게 가르쳐줬다.


아이는 나를 엄마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원장님보다 훨씬 친절해서 좋다고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내 아이가 제법 어려운 곡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꼭 누르며 치는 보며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저 작은 손으로 무려 건반 두 개를 동시에 누르다니!


그렇게 나는 다시 피아노에 눈을 떴다. 학창 시절 치던 가요와 팝송, 디즈니 곡들, 그리고 대학생이 돼서 심취했던 재즈 피아노들이 다시 떠올랐고 20대의 느낌, 20대의 내 모습을 다시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재즈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지.

엠피쓰리에 가득했던 재즈음악, 재즈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 싶었던 그런 한때를 살았었지. 아이가 아니면 떠올리기 힘들었을 오래된 나의 꿈을 기억의 저편에서 꺼내어 먼지를 탈탈 털어본다.

아이 피아노 연습을 위해 구매한 전자 피아노 앞에 앉아 나를 위한 연주를 한다. 건반을 잘못 누르기 일쑤지만, 새롭고 반갑다. 잠자고 있던 음악에 대한 감정과 한창 빠져있던 선율들이 떠올라 마음이 말랑말랑 해진다.



내 아이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다. 하루 종일 앉아서 그림만 그리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나도 그랬다. 중학교 때까지도 그림 대회 나가서 제법 상도 받고, 수십 가지 물감과 야외용 이젤을 들고 다니던 멋진 어린이. 


회사를 15년 넘게 다니며 손에 들어봤자 볼펜이었다. 항상 키보드를 두드려야 했기에 손가락은 늘 아프고 부어있었다. 출산 후 쉬지도 않고 키보드 위를 떠돌던 내 손가락.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관절염이란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 덕분에 볼펜이 아닌 붓을 들게 된다. 물감을 짜보는 것, 붓에 물을 묻혀 물감에 섞고, 파란색 물감에 흰색 물감을 섞어보는 것. 모든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15세로 점프하는 느낌에 기분이 좋다. 하늘도 그리고, 바다와 파도도 그려본다. 노을도 그리고 무지개도 그린다.

심지어 아이가 좋아하는 디즈니 영화의 원주민까지 그려본다.

원주민 이라니..



아이를 키우며 다시 한번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정해진 답과 네모반듯한 잿빛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아이에게 어떻게 이 세상을 설명해주어야 할지를 생각한다.


무지개는 무슨 색인지, 왜 생겨나는지.

사랑이란 무엇인지.

사람은 왜 질투를 하는지.

잘못해놓고 사과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게 되는지.


편견과 근심으로 가득한 어른의 눈이 아니라 아이의 밝고 해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나 역시 모든 사물을 다시 보게 된다.


길가의 잡초와 운동장의 하찮은 돌멩이마저 예쁘다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아이를 보면서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을 다시 산다. 

아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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