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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May 09. 2022

우리의 전세 블루스

저는 전세에요.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 만난 나의 보금자리. 학교 앞 하숙집과 자취방이 즐비한 그 골목길이다. 그 하숙집이 어느 정도로 기억에 남느냐면, 바로 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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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찾은 내 보금자리는 신촌 먹자골목이다. 연세대 독수리 다방 뒤쪽 길로 들어오다 보면 2층 주택이 즐비하다. 그곳에 내 두 번째 보금자리가 생겼다. 주택에 방이 2개인데, 화장실은 하나다. 옆방은 개를 키우는 여학생이 산다. 간혹 집에 드나들며 마주치기는 하지만 우리는 철저히 타인이다. 방문 밖의 소리를 듣고 화장실을 이용 중인 것 같으면 절대 밖을 나가지 않는 한 번도 논의한 적 없지만 철저히 지켜지는 암묵적인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다. 말도 섞지 않는 타인과의 동거라니, 집이란 나만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이동한다. 먹자골목에서 조금 더 뒤쪽인 신촌 굴다리 근처다. 여기는 제법 가정집의 모습을 한 주택들과 원룸 건물들이 가득하다. 1층에는 식당이, 2층과 3층은 원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층에는 5집이 있으며 이곳 역시 서로 철저히 타인으로 살아간다. 집은 여느 대학가 원룸과 마찬가지다. 아담한 공간에 작은 싱크대, 화장실, 미니 냉장고, 책상과 침대를 갖추었다. 수업이 끝나면 먹자골목에 위치한 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지친 몸으로 들어와 음악을 들으며 살아가던 신촌 청춘이다. 내 평생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볼일이 없을 만큼 거대한 바퀴벌레를 목격한 곳이 이곳이다. 내 집 바로 옆에 보일러 실이 있었는데 집에 들어갈 때마다 보일러실에서 낯선 이가 튀어나올까 봐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집은 무조건 안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자리 잡았다. 


나는 이곳에서 대부분의 대학생활을 하고 해외에 취업을 하면서 신촌을 떠났다. 공항버스에 짐을 가득 실어 인천공항으로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인 것처럼 아련하게 뒤돌아봤는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신촌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살고 있다. 역시 인생은 모를 일 투성이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강남 역삼동에 위치한 해외 체인의 호텔에서 근무를 했다. 그 지역에 생소하던 나는 엄마와 함께 집을 알아보러 다니다 대로변에서 한 블록 뒤에 위치한 깨끗한 빌라가 마음에 쏙 들어 계약을 했다. 빌라는 신축인 편이라 꽤 깨끗했고 무엇보다 동네가 너무나 조용했다. 신촌에 살 때는 늘 멀리서 소음이 들려왔는데 이곳은 어쩜 이렇게 조용한지. 후에 알게 되었는데 내 빌라가 위치한 지역은 근처 밤업소 종사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미용실이 많은 이유를 그때야 알게 되었다. 늦은 저녁 퇴근 후 돌아오는 길에 즐비한 미용실들에는 왜 사람이 많은지, 왜 그 시간에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깨끗한 건물과 상냥한 임대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약 전 주변 환경을 필히 자세히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참으로 뒤늦게 깨달았다. 


결혼을 하고 첫 아파트는 일산이었다. 그 당시 부모 도움 없이 남편과 내가 모은 돈으로 계약할 수 있었던 아파트는 서울 내에는 없었다. 일산에 위치한 부동산 실장이 우리의 예산을 듣고 보이던 실소를 잊지 못한다. 어쨌든 우리는 복도식 아파트를 전세계약을 했다. 복도식 아파트는 처음이었다. 복도식 아파트의 단점도 물론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사는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복도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형체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고, 창문이 스르륵 열릴 것 같았다. 지독하게 악몽을 꿨다. 일산 칼바람이 얼마나 매섭던지 겨울에는 동파가 되기 일쑤였고, 물을 졸졸 틀어놓고 자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파가 되면 드라이기를 들고나가 녹여야 했다. 지하 주차장이 너무 협소해 아파트는 늘 주차난이었고,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지하 주차장 쟁탈전이 벌어졌다. 계약이 끝나고 조금의 돈을 더 모은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용산에 위치한 아파트다. 젊은 부부 소유의 집이다. 아내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데 예상치 못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왜 너는 집이 있고, 나는 집이 없는지, 살짝 부끄러워졌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로 복도식 아파트의 악몽은 더 이상 꾸지 않았다. 둘이 살기에는 오붓하고 좋았는데, 이곳에서 아기를 낳고 키우게 되면서 더 쾌적한 아이 키우기 좋은 집에 대한 니즈가 생겼다. 맞벌이로 쉴세 없이 열심히 벌었으니 또 한 번 이사를 해본다. 


마포에 위치한 아파트다. 시설, 조경, 뭐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한 곳이다. 용산과 비슷한 평수로 전세 계약을 했지만 모든 것이 더 새롭고 깨끗했다. 2년 만기 후 또 이사를 해야 했지만 이 아파트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2년간 또 열심히 모았으니 이번엔 다른 동의 큰 평수로 이사를 해본다. 그때 조금 더 돈을 만들어 매매를 할까 잠시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집값 금방 떨어질 거라는 기사들이 넘쳐날 때였다. 지금 사면 우리만 손해일 텐데 뭐하러 대출받아 집을 사나 싶어서 큰 고민 없이 큰 평수에 전세 계약을 했다. 그때 집을 샀으면 나는 지금 수억을 벌었을 것이다. 


큰 평수에 새롭게 계약한 곳은 나보다 5살 많은 여자 임대인이다. 고작 5살 많은데 이렇게 넓고 좋은 집이 있구나. 회사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야근하며 정신쇠약에 시달리면서 일해봤자 아직 나는 전세살이인데, 당신은 집주인이구나. 


20대 후반에 결혼을 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맞벌이를 했다. 남부럽지 않은 월급을 받아왔고 그만큼 세금도 많이 냈다. 물가와 집값도 늘 오름새였기에 집 살 돈을 모으기 전에 내 집 마련의 꿈은 저 멀리, 늘 나보다 앞서 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신기루처럼, 잡고 싶지만 잡히지 않는다. 이만큼 뼈 빠지게 일하며 돈 벌었으면 내 집 하나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4년 전 마포 전세 계약을 할 때 집을 매매했다면 지금 큰돈을 벌었겠지. 


양가 부모님의 도움이 전혀 없이 부부의 힘으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직 전세살이 중이다. 동네에 알고 지내는 모든 지인들이 "집주인"인 와중에 나만 "임차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대학 때부터 한 번도 내 집 다운 내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허함과 다급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남편은 늘 말한다. 청약만이 답이라고. 만점자가 넘쳐나고 청약 공고마저 시들한 요즘, 우리는 "우리 집"을 갖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내 집 하나만 생기면 이제는 숨 좀 쉬며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신기루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총 12번의 이사를 하며 월세와 전세를 살아왔던 나는 그저 성실하게 살아왔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어떤 불만도 없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노동을 하며 살아왔으며 남편도 그러했다. 남편과 나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과 꿈으로 이루어 낼 - "우리 집". 그 집을 갖게 되는 날, 망치를 들고 방마다 못을 박아 아이의 사진과 그림들을 걸어두리라. 


<source of pic: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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