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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ctober Oct 19. 2020

'그런 사람'이 뭐길래

영화 <해빙>

승훈 [출처 : 네이버 영화]


승훈은 말한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자 인수가 말한다.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애초에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나?!"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악과 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악한 사람 따로, 선한 사람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은 자신이 가진 편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가 말했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인간은 생존하게끔 태어났고,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과정에 적응했고, 선과 악으로만은 살아남을 수 없어, 선과 악이 공존했다. 살인은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 방법이고 이 적응 구조가 우리의 조상이다.”


나는 데이비드 버스와 생각이 같다. 악과 선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악과 선 둘 중 무엇이 먼저냐고, 악과 선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떼어 말할 수 없고, 악이 있기에 선이 있고, 선이 있기에 악이 있기에 그 둘은 닭과 달걀과 같다 말하겠다.

우리는 과연 그런 사람이 아닐까?
과연 악은, 악한 사람은 따로 존재하는 걸까?




나의 믿음이 온전한 진실일까?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온전한 진실일까? 내가 보는 세상과 내 삶 역시 그저 믿는 데로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닐까. 동시에 의심할 수 있을 때까지 의심하라던 데카르트의 합리론이 떠올랐다. 우리는 의심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도, 영화도 당신이 믿는 데로, 믿고 싶은 데로 흘러가 버릴 것이다.




해빙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과연 '악'이기만 할까


우리네 삶도 그렇듯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각자만의 사정이 있다. 승훈도, 수정도, 성근도, 정노인도, 미연도. 등장하는 주인공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그들은 그런 사정으로 각각의 선택을 한다. 어떤 이는 살인을, 어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 어떤 이는 살인을 방조한다.

문득 각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선택이 어쩌면 선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선택 자체가 선이 아니라, 그런 선택 과정이 어쩌면 선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누군가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이유가 잘못된 행동이 단숨에 '선'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를 감싸는 마음마저 '악'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악과 선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까? 악과 선을 나누는 것에는 많은 것이 있다. 사회 규범, 규칙, 도덕, 법 등. 악과 선을 나누는 기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악'이라 말하는 것들이 '악'일 수 있을까? 동시에 '선'이 '선'일 수 있을까? 조금만 기준을 다르게 했더라면 악이 아닐 수도, 선이 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영화 <해빙>은 우리에게 온전한 선도, 온전한 악도 없음을, 그런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음을. 우리 모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을. 우리가 강력하게 믿고 있는 것을 한 번쯤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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