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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해랑 Jun 04. 2024

소주 10병 사줄게, 나랑 사귈래?

고등학교 시절 학교가 유독 집에서 가까웠던 탓에 오직 학교-집만을 반복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애들은 독서실 다니며 소소히 썸도 타고 누가 멋있다더라 누가 날 좋아한다더라 흐뭇한 경험을 할 때도 유독 통금에 엄했던 아빠는 독서실 가느니 차라리 공부를 접어라 하셨다. 그런 탓에 여중, 여고를 다니는 동안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다.


드디어 대학교 입학! 부푼 기대를 안고 입학식을 참석했는데 과의 특성상 내가 여대를 온 건지 착각을 할 정도로 동기생이며 선배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았다.

몇 안 되는 복학생 선배마저 멋져 보일 지경이니..

일단 모르겠고 데리고 다니는 대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 좀 하는 신입생으로 어디든 끼여서 놀았다.

한두 달이 지나니 같이 노는 친구들이 저마다 남자친구가 생겨서 나랑 노는 시간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봄의 캠퍼스는 술향기로 지나갔고 더운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난 혼자가 되었다.

나 빼고 다 애인이 생긴 것이다.

데이트에 끼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눈치 보였다.

다행히도 그즈음 미친 듯이 미팅과 소개팅을 해서 애매한 썸의 관계인 남사친이 3~4명 정도 되어서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아 누구를 골라야 첫 남자친구로 좋을까?’


초복 때였다. 술자리에서는 몇 번 봤던 선배인데 학회장인 거까지만 아는 선배가 대뜸 문자가 온다.

“ 삼계탕 사줄게 나올래?”

더워 죽겠는데 뭔 삼계탕이람. 나가기도 귀찮고 정중히 거절했다.

며칠 후 또 문자가 왔다.

“ 소주 10병 사줄게. 학교로 나와~”

아니 내가 그 당시 술을 멋모르고 부어라 마셨지만 소주 10병이라니요. 친하지도 않은 선배가 밑도 끝도 없이 뭔 말이야 이러며 다음에요~ 한마디 날렸다.

그 후로도 잊을만하면 소주 10병으로 자꾸 플러팅을 날렸다. (지금 생각하니 멋없는 플러팅이었네)

방학이고 집에 있기도 심심하고 친구들은 연애하고 소주라도 사준다니 나가자 싶어 학교로 갔다.

막상 불러내놓고서는 말도 없고 술만 사준다.

‘ 이선배도 어지간히 심심하구나’  

매우 말수가 없어서 다른 선배들이 좀 더 오고야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며칠뒤 개강을 하루 앞둔 어느 날 문자가 왔다.

“ 소주 10병 계속 사줄게 나랑 사귈래?”


신박한 소주 10병 고백에 썸 타던 몇 명을 다 버리고 이 선배와 사귀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친하지도 않은 선배의 고백에 한 번에 오케이 외친 많이 외로운 여자였네 싶다.

사귀고 나서야 친해지고 좋아하고 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야 생각하니 내가 원했던 남자의 이상형을 갖춘 사람이었다. 말수 없고 나보다 덩치가 커야 하고 목소리가 굵고 내가 배울 점이 있는 유식한 사람.

그렇게 1학년부터 연인이 된 우리는 지금은 부부로 내 아들의 아빠와 엄마가 되었다.

살면서 더 좋아지는 좋은 사람을 바로 찾은 20살의 나 자신 칭찬해.


제목사진: 네이버 이미지"내 머릿속의 지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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