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은 May 30. 2017

[안녕 베를린] 이제 이유 없이 웃어 볼게

Let what's made of us be right

컵라면과 맥주, 작은 과일과 초콜릿으로 부실한 식사 사이사이를 채우며 지냈다. 내 집, 내 부엌에서 재료들을 잔뜩 늘어놓고 요리하고 싶다. 이곳도, 한국도 이미 여름이라 불앞에 서 있는 게 고역일 것 같지만, 일단은 나를 위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 


이것 봐, 벌써 내 머릿속엔 수고했다는 말이 맴돈다. 분명 쉬려고 떠나온 여행인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쳐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지 왜.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여전히 '잘' 쉬는 건 어렵다. 짧게는 2년 반, 길게는 지난 4년을 위로하려고 마련한 두 달인데, 마음이 좀 풀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제 맴돈다. 게 아니라, 다시 '먹고살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이곳의 풍경을 보고 지낸 얼굴이 무색할 만큼 그새 굳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그러니까 밥부터 먹고 힘내자 이거다. 내가 차린 밥, 엄마표 비빔국수, 아빠표 돼지(김치/된장)찌개, 너의 딴삥(蛋餅)까지… 다 먹고 시작하자. 밥 먹으면서 딴짓하면 체하니까.


이렇게 아무 데서나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 괜히 울컥한다. 누가 심어놓은 건지 색감 조화도 기가 막힌다.

*일요일의 관광


일요일 오후, 사람보다 나무 그림자가 거리를 잠식한 이곳의 풍경이 새삼 고마웠다. 마지막 날까지 이방인인 나에겐 텅 빈 거리가 주는 묘한 안정감이 그저 반가울 따름. 언제나처럼 방해 않고 조용히 걷다 갑니다. #그냥지나가면돼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Kaiser Wilhelm Gedächtniskirche


2차 세계대전의 폭격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고 해서 '썩은 이빨'로 불리기엔 아름다운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해피 새드의 느낌이 이런 걸까.

No more war, walls, also terror

교회 앞에는 지난 크리스마스 마켓 테러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장소가 마련돼 있는데 오늘은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땅에 고개를 박고선 한참을 울다 자리를 떠났다. 나는 평소보다 긴 묵념을 했다.


오늘 오후엔 이런 것들을 먹으며 목표를 세웠다. 전부 달기만 한 것들이네. 내 목표의 맛도 그러하겠지.

네가 보내준 서울의 노을. 못 본 사이 많이 예뻐졌다. 나도 속성으로나마 예쁜 마음을 준비해야겠다.




오랜만에 꽃모닝! 엄마에게 이 모든 꽃 사진을 보내고 '선인장 사 와'라는 답장을 받았다. 집주인이 옆방에 있는데도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크게 웃었다. 방 천장이 높아 원래 웃음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다. 으하하하

저걸 어떻게 가져가. 그러게 너무 예뻐서 그냥 해본 소리. 아 요 근래 들어서 제일 크게 웃었네. 왜 안 웃니 그냥 꽃도 보고 웃고 경치 보고 웃고 매일 웃어 그래야 행복하고 건강해. 

알았어 엄마. 엄마 때문에 성격도 많이 배렸지만 난 결국 엄마 때문에 웃어. 나도 좀 이유 없이 웃어도 됐을 텐데, 여기 와서도 스스로에 대한 몹쓸 검열을 멈출 수 없었나 봐. 내가 여기서 이래도 되나, 이렇게 좋기만 해도 되나 계속 이런 기분이 들었거든. 종종 이 여행이 힘 들었던 것도 결코 한국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한국에서처럼 나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보면 가끔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유난히 못 견뎌하는 건(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있기 마련이지만), 셀프 회초리를 너무 자주 들기 때문인 게 아닌가 싶다. 이미 눈도 종아리도 퉁퉁 부었다고요...

꽃보다 파자마(내 멋대로)


성경책을 앙 문 채 날개뼈를 지탱하고 있는 이 작품은 얼마나 무거운가. 내 아구가 다 아팠다.

이거 보고 너무 뜨끔해서 진짜 마음을 고쳐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피크닉. 여럿이 어울리는 건 즐겁다.

사람들도 내게 입을 열지 않고 나도 전할 말없이 두 달을 보내다 보니, 이렇게 이벤트처럼 누군가와 어울리는 시간이 너무 큰 의미로 다가온다. 떠나오기까지 이런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살았다고 생각하면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새삼 고마운 나의 사람들 :D

이런 풍경을 보면 돌아가기 싫기도 하고 그렇다. 물론 아주 잠깐이지만.

베를린에 두 달이나 있어도 마지막에 베를린 대성당이 제일 보고 싶은 나는 과연 촌스러운 사람.


베를린 대성당은 나의 잔인했던 4월에 처음으로 색을 입혀준 곳이다.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은 봄이 두려워 드레스덴으로 잠시 도망가 있었는데, 돌아오고 나니 봄을 건너뛰고 여름이 도착해 있던 베를린. 모든 것이 반짝이는 초여름의 이곳에서 기대했던 것처럼 베를린 대성당이 제일 예쁘게 빛나고 있어 기분이 참 좋았다. 

드레스덴에서의 마지막 밤, 아우구스투스 다리의 야경을 보면서 '안녕 아마 다시는 못 올 거야'라고 되뇌었을 때도 전혀 슬프지 않았는데 오늘은 좀 울컥했다. 에잇 지금도. 역시 작별 인사는 있어도 없어도 슬프기는 매한가지구나.

미테에서 가장 자주 갔던 필터 커피도, 고개를 들면 이런 표정을 하고 있는 하늘도-


담담한 척했지만, 아마 내일도 그러겠지만 너무 그리울 거야. 벌써부터 후폭풍이 감당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그래서 나는 더 애써 밀린 내 일상을 악착같이 끌어안겠지. 엄마 말마따나 돌아가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웃어야지. 내게 너무 과분했던 이 봄이 쉽게 잊히도록. 

정말 고마웠어.

작가의 이전글 [다시 베를린에서] 말이 많네 여전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