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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29. 2017

[다시 베를린에서] 말이 많네 여전히

I talk too much

*진눈깨비 소년 by 쥬드 프라이데이


늘 계획과 목표를 동일선상에 놓고 살던 나는, 이번 화를 보는 내내 조금 아팠다. 그리고 몰랐던 나를 알게 됐다. (또? 이제 그만.. 아니 더, 그런데 이런 모습으론 말고) 계획대로 일을 마치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였구나. 길거나 넓게 보지 못하고 좁고 짧게 보며 살았구나. 그래서 자주 방향을 잃고 흔들렸구나. 이제 알겠다! 그럼 이제 나의 목표는, 목표 다운 목표를 세우는 것.




*대규모 독일식 델리, 로가츠키에 들렀다. @charlottenburg


로가츠키 가족이 1928년부터 몇 대에 걸쳐 운영해오고 있는 이곳은 훈제 장어와 연어로 유명한 곳이다. 마켓과 간이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동네 주민들이 한데 모여 직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식사하는 모습이 굉장히 정겹고 캐주얼해 보였다. 한국인인 나에게는 낯설고도 한 번쯤은 그려봤을 이상적인 분위기. 비릿하고 고소한 냄새를 맡고 있으니 안전한 기분마저 들었다.

오랜만에 싱싱한 해산물을 봐서 신이 났다.

*옆 테이블 아저씨의 추천으로 주문한 이곳의 베스트 메뉴, 감바스!


나도 열흘 동안은 샤를로텐부르거 주민이니까, (물론 그 이유와 무관하게) 저렇게 가득 따른 와인을 몇 잔이나 프리패스로 받아 마셨는지 모르겠다. 와인 따라줄 때마다 내게 윙크하던 아줌마, 걸크러쉬 제대로였다. 한국의 통일을 기다리겠다던 아저씨도 고마워요. 반가웠어요. 이날의 디쉬는 참 신기했는데, 덕분에 이제 바에 서서 느릿한 식사를 즐기는 게 어렵지 않다. 일부러 새우 먼저 콕콕 찍어 먹어도 먹어도 바닥이 쉬이 보이지 않았고, 와인은 잔을 들 때마다 새로 주문한 것처럼 묵직했으니.

나는 술이 세니까, 저렇게 네다섯 잔을 마셔도 취기만 살짝 오를 뿐이었는데 밤 9시에도 저녁 7시 같은 이곳 하늘의 푸르스름한 빛을 받으며 걸으니 어쩔 수 없이 조금은 흥겨워졌다. 왠지 뒤척이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실로 이곳에서의 평소보다 오래오래 잤다.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같은 잠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어둡다고 남은 시간들을 죽이기엔 뒤늦게 찾아온 이곳의 봄이 너무 예쁘다.


오늘도 S반을 타며 하루를 시작했다. 덜 마른 머리칼이 목덜미에 닿으니 어김없이 미미한 두통이 밀려온다. 어깨까지 내려온 찬 기운과 얼굴 한 쪽을 데우는 햇살을 동시에 느끼면서 눈을 감는다. 이 와중에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부드럽다. 

기본적으로 창이 큰 데다가 위쪽 보조 창문을 열 수 있는 베를린의 지하철이 좋다. 오늘도 누군가 창문을 열어놔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살랑 드나든다. 슬며시 눈을 뜨면 꽃가루가 꽃눈처럼 펄펄 날리고 있다. 알레르기가 없는 나는 마냥 신기하고 귀엽기만 하다. 이 불확실한 생명체와 함께 다른 나라가 아니라 아주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하는 기분도 든다.
 또 맞은편에 앉은 승객은 때때로 잘생겨서 즐겁다.

*당분간 내 에코백이 세상에서 가장 귀여울 예정입니다. 다행히 누가 말리지도 않았는데 모자는 사지 않았어요.


맥주야 한국에서도 원래 잘 마셨고, 베를린에 와서 초콜릿 세계에 새로이 눈을 떴다(기엔 리터 스포트에 한정). 오늘은 아예 리터 스포트 매장에 들려서 가족들 몫의 (거의 내가 다 먹을) 초콜릿을 사고, 귀여운 에코백이 3유로도 안 하길래 고민 않고 바구니에 담았다. 여름 동안 부지런히 들고 다닐 테니 달콤한 기억 좀 만들어주라.

반짝 더운 공기는 조금 우울한 마음을 말리기에 그런대로 괜찮았다. 서브웨이에서 틀어놓은 라디오 선곡도 좋았고. 낯선 나라의 티브이는 어렵고 가끔 무섭기도 하지만 라디오는 어쩐지 정겹다. 귀에 익은 60년대 스타일의 팝송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천장의 실링팬이 돌아갈 때마다 뭉쳐 있던 공기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히피펌을 한 노란 머리 여자가 주문을 한다. 그녀의 헤어스타일을 부러워하며 고개를 돌린 창밖에는 난데없이 마차가 지나가는 이곳은 어디인가... 


베를린 한가운데에서 서프 뮤직이 흘러나오고 서프 뮤직하면 역시 비치 보이스지... 이윽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Love & Mercy>가, 작품의 주인공인 폴 다노가 떠오르고... 하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 폴 다노의 모습은 <Youth> 속 찰나 같은 역할이었지... 마침내 아아 그러면 지금 이 여행도 내 젊은 날의 짧은 여름 같은 거로구나 하는, 지루한 상념의 시간. in 서브웨이




Our journey's just beginning
Nothing but love can last forever

지금까지 겪은 모든 시간을 다 기억하고도 나는 언젠가 또 살아보는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그땐 외로움을 모르고 감히 외로움을 찾아 떠난 이 여행과 달리, 외로워서 선택한 여행이 되겠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그런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다 자신하고 비행기를 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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