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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27. 2017

[다시 베를린에서] 봄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면

무슨 계절이 오나요?

오늘 오후를 기점으로 깨닫게 된 무엇이 남은 하루를 종일 괴롭히고 있다. 아주 생경한 느낌이라 아직까지도 좀 놀랍다. 바로 내가 스스로를 꽤나 '대단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결국 며칠간 차분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김칫국을 들이마셨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리석게 나 자신마저 속일 수 있다고 믿은 게 아니라면, 이건 자기 객관화가 덜 된 인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징어 먹물 같은 자아를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 홍상수뿐만이 아니었다니 :( 이걸 어떻게 복구한담...




*The Barn Coffee Roasters


시작은 좋았다. 커피를 마시고 또 마셨다. (그래서 결국 하루를 말아 먹었나 보다..

더 반 로스터리 점 입구에는 여전히 문라이트 포스터가 붙어 있고 당연히 커피도 맛있었다. 그래도 너만 편애하기에는 막상 돌아온 이 도시가 새삼 아름다워서, 알량한 욕심이 생겨서 또 오진 못할 것 같아.

파이브 엘리펀트로 향하는 발길을 잡은 베트남 스타일의 카페

당면이 들어간 야채호빵을 닮은 Banh Bao. 표면에서는 희미한 술빵 냄새도 났다. 그리고 sweetened condensed milk, 말로만 듣던 연유 커피! 너무 맛있었다. slow coffee라는 이름이 덧붙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찻잔 위에 얹힌 필터를 통해 걸러지는 커피 방울이 다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바닥에 있는 연유와 섞어 마시면 되는 거였다.

이렇게 커피가 다 내려올 때까지 빵 먼저 먹으면서 인테리어를 구경했다. 미테 한가운데 있다가 잠시 다른 세계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오늘 베를린 날씨도 뭔가 적당히 습하고 선선했던 게 꼭 비 온 뒤 불어오는 동남아시아의 바람 같기도 했고... 엄마의 생일이 돌아오는 가을에 함께 베트남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엄마는 커피를 못 마시니까 또 내 것만 시켜놓고선 한 입만 달라고 할 엄마를 상상해보니 정말로 가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더 반처럼 이곳도 천장이 높아서 조명 달 맛 났겠다 싶었다.
카페 화장실 인테리어가 근사하면 내 기분도 덩달아 업그레이드된다. 왜 그럴까? 음, 나도 겉으론 잘 드러나지 않은 곳을 더 신경 쓰며 살아야 할 텐데.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이 작은 잔을 몇 모금씩 아껴 먹으면서 계속 찍었다.


단짠 말고 단쓴이 좋다. 이거슨 단쓴 커피!! 달고 씁쓸함의 조화가 기가 막히는 맛이로군. 구성도 뭔가 동남아스럽게 아기자기하다. 이런 귀여움 틈에 비집고 들어가 한 숨 자다 일어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 나는 몸집은 크지만 취향은 참 작은 사람... 너무 큰 세계에 와 있으니 오늘 같은 날엔 어디에 나를 숨겨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게 오는 길
내게 오는 길2

베를린 지하철이 노선도 워낙 많고 배차 간격도 짧은 편이긴 한데, 이렇게 다리 위에서 빈 철길을 바라보다 카메라를 들면 귀신같이 지하철 앞머리가 나타난다. 오늘도 어김없이 달려오는 지하철이 괜히 고맙고 또 반가웠다.

결국 내가 그리워하게 될 풍경도 이런 거겠지.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이는 풍경들. 지켜보지 않아도 조용히 지나가고 있는 것들.

맥주 한 잔 마시고 조용히 집에 왔다.


나를 스쳐가는 것과 내게 머무는 것과 내가 스쳐 지나야 하는 것과 내가 머물러야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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