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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25. 2017

[다시 베를린에서] Good bye wednesday

Good bye my last hump day

돌아온 베를린에는 이미 봄이 와 있었다.


독일의 수도에서 떠올릴 만한 시(詩)로는 왠지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구나 싶었다. 하루 중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는다니. 이제 일기예보를 그대로 믿어도 된다니. 해가 뜨면 바람이 불지 않는다니. 이제 나만 온화해지면 되겠구나. 어떡하지, 드레스덴에서의 마음 수양은 이미 지내는 동안 다 바닥 나 버렸는데.

*포츠다머 플라츠 가는 날=베를린 필하모니 런치 콘서트 보러 가는 날


기린 레고는 새삼 반갑고, 클알못이지만 베를린 필하모니에서의 공연은 여전히 뭉클하고. (다음의 두 경우 모두 1층의 메인 좌석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전제하에) 2층이 무대 전체를 내려다보기에 좋다면, 1층 뒷자리는 피아니스트의 손짓을 감상하기에 아주 제격이다. 연주자들의 손짓이 너무 우아해서 때때로 고막보다 시선을 더 자주 빼앗겼다.

아직 한 번의 런치 콘서트 관람 기회가 남아 있다.

공연을 보는데 간의 의자를 가져와 관람하던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 즈음 나는 하품이 좀 났고, 그건 단지 내가 클래식에 문외한이어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더는 4월처럼 우울에 잠겨 있지는 않지만, 이제는 깊은 감상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울적해졌다. 왜 내 감정 상태는 지옥 아니면 無에 가까운 걸까. 내 일상에는 그냥 지나가는 양념 같은 감흥 몇 꼬집만 있으면 되는데.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ZOO역으로. 관광객 루트가 따로 없다. 살아보는 여행해봤자 똑같다 이거예요.

이유 없이 좋은 비키니 베를린. 포츠다머 플라츠나 알렉산더 플라츠보다 ZOO역에 오면 베를린 한가운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비키니 베를린 건물의 타이포가 너무 귀엽다. 느낌 있어! 그럼 내일은 1층 파이브 엘리펀트 커피 먹으러 가야지!

라고 생각해도 왠지 풀이 죽는 마지막 일주일.

동물원 뷰를 보면서 밥을 먹었다. 멋진 곳에서 식사 다운 식사를 하는 것. 오히려 한국에서는 혼자서도 참 잘했던 일.


밥을 먹으면서 잠시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라는 책 생각이 났다. 책을 읽은 이후로는 이날처럼 초록이 무성한 풍경을 보면 꼭 소설 속 무재 씨의 말이 떠오르곤 한다.

"하늘이 굉장하네요. 나는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역시 유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중략) 아무튼 이런 광경은 인간하고는 너무도 먼 듯해서, 위로가 되네요.

맞다. 다만, 한국에서는 이런 풍경이 실로 따뜻한 위로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과연 인간은 다른 모든 것들과 
'유별하다'는 느낌만 더해져 조금 괴로웠다.

조만간 맥주랑 후무스를 먹고 후식으로 파이브 엘리펀트의 커피를 마실 거다. 저녁까지 흥이 남아 있다면 같은 층 맞은편의 몽키바를 다시 들려도 좋겠지. @Neni Berlin @Monkey Bar


그러니까 이런 공허한 다짐이나마 계속하는 한, I'm fine.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창에서는 더더욱.




아침과 저녁. 이렇게만 먹어도 살 수는 있다. 지금 나는 아슬아슬하게 무기력하다.


수요일이다. 한 주의 반이 지나가는 날이라고 해서 hump day라고 불린다. 놀고먹는 주제에 험프데이를 운운하다니, 내게 수요일은 이미 지나간 어제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과도 전혀 다르지 않은 하루인데. 여전히 얄미운 상상을 잘하고, 염치가 없다. 그럼 입이라도 다물어야 하는데 나에게 약한 사람한텐 그게 쉽지 않다.

괜스레 억울한 기분을 한바탕 쏟아낸 뒤 내일 아침 몫으로 남겨둔 빵을 마저 먹고 나니 머리가 좀 가벼워졌다. 물론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인 지금, 엄마는 악몽을 꿀 지도 모르는데 나는 한가로이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탈탈 널고 유튜브에서 음악을 고르고 있다. 그녀와 나 사이의 시간은 늘 불공평하게 흐른다.           
    

너는 왜 내내 잘 버티다 꼭 마지막에 전부 억울해하니. 그러니까 외롭지. 지나간 건 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라고 말하는, 수천 번은 반복됐을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엄마는 내 메시지를 읽고선 답장 없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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