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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24. 2017

[다시 베를린에서] 바다를 닮은 호수

보고픈 마음이 호수만 해서 반제(Wannsee)를 찾았다

다시 베를린에 돌아왔으니, 베를린을 대표하는 맥주 중 하나인 슐타이스 필스너로 하루를 짠-

4월의 베를린을 혹독하게 겪은 나는 4시 반부터 동이 트기 시작하는 이 봄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오늘도 6시 즈음부터 완전히 날이 밝았고, 덩달아 내 정신도 지나치게 말짱해져서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베를린으로 넘어가는 비행기에서도 안 쓴 수면 안대를 숙소 침대 위에서 쓸 줄은 몰랐는데, 속수무책으로 들이닥치는 햇빛 때문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실로 요 며칠 동안의 아침은 여행 막바지에 찾아온 권태를 힐난하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니 나가는 수밖에.

한 번은 남자친구가 숙소에 그 돈을 써놓고 왜 하루도 집에 붙어 있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렸는데, 아니 진짜 내 집이 아닌데 어떻게 내 집처럼 있어요??? 언젠가 블로그에도 써놨지만, 실로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문구가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인지 몸소 느끼고 있다. 여행은 여행다워야 한다. 호텔처럼 200%의 프라이버시와 안락함을 보장하든지, 호스텔처럼 숙박비를 덜어주고 인간관계에 다이내믹함을 더해주든지…. 

물론 여행 초보자인 나는 에어비앤비 덕을 아주 많이 보고 있다. 그래도 캐리어 2개를 끌고 숙소를 4번 정도 옮기고 나니 진이 빠져버렸나 보다. 마치 나 자신이 돌아갈 곳이 명확한 여행객이 아니라 계속 이렇게 독일 어딘가를 떠도는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빨리 기념품을 바리바리 싸 들고 테겔공항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다. 
참, 미리 알아본 건 아지만 운이 좋게도 마지막 숙소로부터 공항까지는 20분도 안 걸린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후 2시 비행기인데 아침 10시까지 공항에 갈 거다. 나는 진짜 이상한 사람...

그래서 오늘은 바다를 닮은 호수, 반제(Wannsee)에 왔다. 베를린으로 돌아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반제 호수, 하나는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이다. 이미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을 보고 왔지만 그래도 베를린 중심부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정형화된 유럽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니, 오늘처럼 날이 좋은 날 드레스덴 추억팔이라도 할 겸 포츠담을 가고 말겠다.

반제는 지난 한 달 하고도 보름 내내 S반을 타고 이동하면서 여러 번 들어본 종점 역이다. 베를린에는 정말 많은 공원과 또 많은 호수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유명한 반제가 마침 새로 옮긴 숙소에서 15분 밖에 걸리지 않아 아침 산책 겸 오늘 일정을 미루지 말고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반제역 건너편 계단을 따라 오르면 이렇게 수풀 사이로 호수가 빼꼼 드러난다. 계단을 오르지 않고 얕은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호수가 보인다.

호수 반 바퀴를 돌아 반대편 구역으로 데려다주는 유람선(즉 한 바퀴를 전부 둘러보려면=다시 역으로 돌아오려면 왕복 티켓을 끊어야 한다). 나는 교통 정기권을 끊고 다니는데 신기하게도 유람선에서 이를 탑승권으로 인정해주는 시스템이라 무료로 올라탔다.

호수의 크기도 그렇지만, 색도 바다 같았다.

사람들이 줄 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저 유람선 가운데에 노란 아이콘으로 명시된 BVG 발견! 혹시 내가 가진 교통권으로도 탑승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급히 뛰어가봤다. 그리고 마지막 승객으로 입장! 후후

양평 아니고 베를린
당연히 사진은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지만 심지어 휴대폰 갤러리를 컴퓨터로 옮기면 조금 오바해서 내가 그리는 것보다도 못할 것 같은 비주얼로 변환돼 속상하다.
Woo 너무 쉽게 변해가네
이건 카메라로 찍은 것. 도긴개긴이어도 괜찮아. 내 마음에만 들면 되지 헤헤
호수로 남기에는 반제의 아량은 너무 넓어 보인다. 너는 흘러서 먼 바다에 닿아야 할 것 같은데 이 흐름이 결국 도돌이표라니.
오늘 깜짝 반제 동행객. 오늘을 닮은 흰 국화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란색을 입은 국화.

포스팅을 하는 사이 시간이 지났네. 5월 23일이었던 어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8주기였다. 나는 아직도 2009년의 어제를 잊지 못한다. 스무 살, 첫 축제를 앞두고 캠퍼스를 떠다니던 그 공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모두가 주말 광장의 비눗방울 장인처럼 한없이 들떴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더랬다. 이윽고 동아리방 TV에서는 이 같은 풍경과 너무나도 상이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매년 5월 23일이면 그를 너무 일찍 잃었다는 후회와 아픔보다 먼저 그날 동아리방에서 느낀 충격을 다시금 재현케 된다. 장담컨대, 한 인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누구라도 그를 떠올린다면 8할은 웃는 모습일 그 얼굴이, 꿈같은 스무 살 봄 한구석을 찢고 나온다. 오늘 아침 달력을 확인하고선- 아직도 내 나라에는 울 이유가 너무 많지만, 조금씩 덜 울고 더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어서 생각난 푸른 반제는 홀로 그를 추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추도식 참여 기사가 종일 올라왔다. 그동안은 먹먹한 회색빛이었던 이날에 올해를 기점으로 조금씩 푸르름이 더해질 것 같다. 여름을 마중 나온 늦봄에 꼭 맞는 색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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