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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Feb 06. 2019

an Editorial (B) 산 책과 걷는 시간 #3

떠나지 못하는 이유 / 해은

도통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써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사이 서른이 되었습니다조금 더 아득해진 날들의 빈칸을 유의미하게 채워보고자, 영화책방 35mm를 운영하는 미화 작가님과 함께 콘텐츠 메일링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냉온의 차이가 큰 두 작가가 월 수 금요일마다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2019년 1월 9일 수요일부터 배달되고 있는 두 여자의 이야기는 댓글, 혹은 eun10532@naver.com를 통해 무료구독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더 읽히고 싶은 저희의 눈 밝은 독자가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월요일: 해은의 ‘산 책과 걷는 시간’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걸으며 말했습니다. “어제는 아주 보람 있는 하루였다. 글 쓰고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라고. 매주 한 권의 책을 사고 일주일 동안 낯선 이야기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저야 대부분 서울 한복판을 걷겠지만, 언젠가 런던을 산책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an Editorial (B) 산 책과 걷는 시간 #3 비수기의 전문가들 / 해은



비수기의 전문가들 : 떠나지 못하는 이유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왜 베를린에 가느냐고. 그러면 물어오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대답을 돌려주었다. 많은 보기를 준비했지만 예상처럼 혹은 예상과는 달리 나의 여행을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황한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곧 이런 식으로 되물었다. “아~ 그렇구나…. 근데 왜 하필 베를린에?” 짧은 이별의 순간이 가까워질 때마다 베를린에 가야 하는 이유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미처 답을 구하지 못하고 도착한 베를린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곤 했다. 왜 이곳에 왔느냐고. 새로운 보기로 애꿎은 전혜린 작가를 운운했던 것 같다. 그녀가 여태 살아 있거나 실제보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조금 더 그럴싸한 핑계였을까. 다행히 베를린에서는 한 손에 꼽고도 남을 만큼의 사람을 꼭 그만큼만 만났기 때문에 대부분의 날들은 안부나 호기심, 기타 번거로운 염려의 부재가 평화롭게 이어졌다.


모종의 해방감과 의도된 우울 따위에 취해 있는 것도 잠깐이었다. 제 존재를 설득하거나 증명하려 하지 않고 (하지만 누구에게? 또 어떻게?) 이다지도 아늑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문득 죄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자 여행 중 발견되는 나의 취향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홈플러스에서 양배추 반통을 사도 그람수와 십 원 단위까지 비교하는 인간이 이곳에서는 유기농 마트만 골라 장을 보는 심보가. 머물던 내내 매일같이 비가 내렸는데 우산을 써도 속수무책으로 젖는 몸과 마음을 말린답시고 외출 할 때마다 몰이해로 가득한 미술관에 들르려는 고집이. 인생에 몇 안 되는, 무지로부터 비롯된 무해가 도처에 널려있는 때였다. 그래도 며칠 간 결핍된 스스로를 마주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후련해졌다. 겸손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존재는 안심하는 듯했다.

드물게 해가 뜨면 광장의 카페테라스를 찾았다. 볕이 귀한 계절이었으므로 턱 끝까지 머플러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빼곡했다. 도로를 장악한 이름 모를 퍼레이드 행렬, 도무지 짖을 줄 모르는 이곳 개들의 낮잠 위로 쏟아지는 햇살과 도무지 단잠을 모르고 요란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만국 공통의 아이들─틈에서 구겨져있던 기분을 슬며시 펼쳐 널었다. 미세먼지 대신 담배연기와 호흡하며 챙겨온 사과를 꺼내 씹다 보면 어느새 테이블 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평안한 소란함이 삽시간에 지워지면 도망치듯 인근 미술관을 검색하고, 한아름 장거리와 돌아가는 익숙한 낯선 하루. 베를린에서의 날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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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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