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효과 / 해은
도통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써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사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아득해진 날들의 빈칸을 유의미하게 채워보고자, 영화책방 35mm를 운영하는 미화 작가님과 함께 콘텐츠 메일링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냉온의 차이가 큰 두 작가가 월 수 금요일마다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2019년 1월 9일 수요일부터 배달되고 있는 두 여자의 이야기는 댓글, 혹은 eun10532@naver.com를 통해 무료구독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더 읽히고 싶은 저희의 눈 밝은 독자가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요일: 익숙한 낯선
익숙하고 낯선 순간에 각자 들었던 음악 두 곡을 소개합니다.
an Editorial(M) 익숙한 낯선 #4 나비효과 / 해은
마감이 끝난 월요일. KFC에서 늦은 저녁을 때우는데 맛이 아주 형편없었다. 특히 세트 메뉴에 부러 추가 금액을 내고 바꾼 음료가 도리어 입맛을 배려 놓았다. 갈색 거품들이 그로테스크하게 모여 있는 커피에서는 구정물을 팔팔 끓인 것 같은 지옥의 맛이 났다. 마침 카카오톡 택시 기사님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셔서 죄책감 없이 쓰레기통에 묵직한 트레이를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구로에서 일산까지는 2만 원 남짓한 택시비가 나왔다. 오후 즘엔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1페이지짜리 대필기사 작성을 요청해왔는데 친정매체 마감을 핑계로 거절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2만원의 고료를 무시해놓고 호기롭게 택시를 타다니. 몸도 마음도 점점 쉬운 것만 찾아 걱정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드라마 <남자친구>를 10화부터 13화까지 몰아보며 주말에 사 둔 와인 한 병을 고스란히 비웠다. 저 클리셰 투성인 동화와 내 인생은 조금도, 아니 한 번도 맞닿았던 적 없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서 혼났다. 세상에서 남 연민이 제일 못 봐주는 일이라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질투나 좀 늘 것이지. 현실에서도 도무지 축하 아니면 같이 울어주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공감은 지능의 문제라지만, 병적으로 공감하는 것도 문제다.
눈과 코는 뜨겁게 젖어 있는데 목으로는 자꾸만 찬 와인이 들어갔다. 결국 아픈 것도 취한 것도 아닌 채로 열이 잔뜩 오른 탓에 보일러도 켜지 않고 잠을 청했다.
객기의 밤 이후. 퉁퉁 부은 얼굴로 침대에서 오후를 내리 보냈다. 이런 날은 인스타그램 피드를 정리하거나 고등학교 때부터 차곡차곡 흑역사를 적립해둔 블로그를 둘러보기에 제격이다. (블로그는 도무지 ‘정리’로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계정을 통째로 삭제한다면 모를까.) 이곳은 무책임하게 보낸 날들에 대한 반성으로 가득해서 ‘can’t or don’t’, ‘오늘의 구원’, ‘멍청이를 위한 동사’따위의 말들이 버젓이 포스트 제목으로 쓰여 있다. 미래에서 본 과거는 어쨌거나 조금은 기특하게 읽혀버리기 마련이라 그걸 믿고 지금까지 쓸 수 있었는지 모른다. 기록된 과거의 특혜랄까, 일단 쏟아내고 나면 부끄럽긴 해도 뭔가 그럴 듯한 날로 박제될 것을 기대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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