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 《아침의 피아노》
도통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써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사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아득해진 날들의 빈칸을 유의미하게 채워보고자, 어쩌면 마지막 취미기 될 책 이야기를 이곳에서 풀어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걸으며 말했습니다. “어제는 아주 보람 있는 하루였다. 글 쓰고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라고. 매주 한 권의 책을 사고 일주일 동안 낯선 이야기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저야 대부분 서울 한복판을 걷겠지만, 언젠가 런던을 산책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언젠가는 읽겠지 라는 생각으로 가방에 책을 넣어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가방을 이삼일에 한번 꼴로 바꿔 드는 와중에도 책을 필수 소지품처럼 옮겨 놓는 나 같은 이도 있을 테다. 물론 파우치나 지갑, 핸드폰 등 가방 속 동지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깥 구경을 하는 동안 책은 얼마간 가방을 옮겨 다니며 애꿎은 귀퉁이만 닳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외출길마다 책 챙기기를 그만 두지 않는 나의 집요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지하철 플랫폼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약속장소에서 나는 종종 가방을 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흘러가는 무명(無名)의 시간 틈에서 책을 읽어왔다. 모든 기다림마다 그랬던 건 아니지만 유독 참을 수 없는 기다림이 이어질 때면 자연스레 가방을 더듬었다. 책은 귀를 쫑긋 기울이게 만드는 수다쟁이 친구 같았다. 어느 날에는 마냥 듣기만 하는 것이 미안하여 향이 좋은 차 한 잔을 사주고 싶기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책을 덮으면 어느새 기다림은 끝나 있었다.
지난 금요일에는 견디기 힘든 기다림이 미리부터 정해져 있었다. 겨울이 제철이라는 방어, 그것도 대방어회를 먹기 위한 모임이 급하게 꾸려졌는데 문제는 평일 오후에 반차를 내고 달려가도 꼭 두세 팀 정도는 제 앞에 서 있더라는 인기 절정의 횟집을 우리도 한 번 정복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마침 무리에서 반 백수로 지내고 있는 내가 친구들의 전광석화 같은 퇴근을 기원하며 기다림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1등은 따 놓은 당상이었지만 모든 일행이 도착한 뒷사람들을 먼저 보내며 두어 시간을 서있어야 하는 고난도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요일의 횟집은 그야말로 生의 기운이 넘쳤다. 초저녁 하늘 빛깔의 수조에는 이름 모를 생선들이 부지런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몇몇은 제 힘을 주체 못하고 튀어 올라 밑에 있던 수조로 풍덩 빠지기도 했다. 이따금씩 밖으로 나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순서를 체크하던 아주머니는 불쑥 뜰채로 수조를 탕탕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방어는 힘이 너무 세서 수조를 열어두면 저기 차도에 뛰어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서너 개의 수조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코끝에 닿는 생경한 비린내도 바닷가의 그것인 냥 시원하게 느껴졌다.
덮개로 가려진 수조의 모서리를 받침대 삼아 슬그머니 책을 뉘였다. 표지의 삼분의 일 정도가 코발트블루를 띤 패브릭 재질로 감싸져 있는 《아침의 피아노》. 한 철학자의 애도 일기를 이토록 소란한 횟집 한 구석에서 읽으려니 꼭 불경한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아 잠시 망설였다.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여백 많은 책장을 넘겼다.
한 번은 시집을 읽는데 무심코 눈길을 준 행과 연 사이, 또는 이 시(詩와) 저 시(詩)사이의 여백을 바라보다 숨이 차오른 적 있었다. 시집보다 희고 깨끗한 면이 많은 《아침의 피아노》를 읽으며 나는 자주 숨을 몰아쉬었다. 미세먼지 섞인 저녁공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지나치게 감정이 잘 옮는 탓이다. 그러나 내게 김진영 철학자의 존재는 아주 낯설고 새로운 정보다. 짧은 약력만 대충 훑어도 그가 살아온 삶과 나의 것은 완벽한 평행선과 다름없다. 아무도 누구를 완벽히 안다 할 수는 없으므로, 나 역시 작가를 모르는 채로 그의 말짓을 흠모하고 제멋대로 평가하기 일쑤지만 ‘애도 일기’라 이름 붙여진 이 책만은 저자에 대해 무지한 채로 읽어가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왼쪽으로 넘어가는 페이지가 진눈깨비처럼 엷게 쌓여가는 동안 자꾸만 스스로를 멈춰 세웠다. 불편한 마음이 계속되려는 찰나, 애매한 애도의 마음을 지우고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그가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린 적 없는데 고인을 향한 으레 젖은 기분으로 글을 읽는 것이야말로 무례한 자세이리라.
그는 정신이 늘 조용한 것만은 아니라고, 정신은 그래야 할 때 우렁찬 것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가령 여름날 야채장수의 트럭 주변으로 울려 퍼지는 명랑한 목청 같은. 나는 방금 전에도 방어의 힘을 마저 일러주고 들어간 횟집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야채장수는 붉거나 푸른 야채의 싱그러움을, 횟집 아주머니는 호시탐탐 수조 밖을 넘보는 생선의 활력을 닮아갈 테지. 매일같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일상의 근심을 무심히 덜어내고 제 앞의 풍경을 또렷이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 발과 굳은 어깨를 풀고선 좀 걷고 싶어졌다. 기다림이 필요 없는 대부분의 날들에도 정적으로 쓰이는 몸은 얼마나 무용한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사는지. 지난날의 무력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생각하니 잠시 아찔해졌다.
《아침의 피아노》는 희망을 노래하는 변주곡 같다. 시작과 끝이 모호한 악보라 어느 악장을 펼쳐도 괜찮다. 희망은 그의 말마따나 곳곳에 편재해있으니까. 세상을 읽는 다정한 눈이 필요할 때 이 책은 당신의 침침한 시력에 마법을 부릴 것이다. 지난 금요일. 뜰채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과 그 다음 물방울을 바라보며, 조금씩 좁혀지는 친구들의 도착시간을 셈해가며 나는 희망을 생각했다.
*이 글은 작가 프로젝트 [an Editorial] 1월 셋째 주에 실린 원고입니다. 2019년 1월부터 2월까지 메일 발송을 통해 진행되었던 해당 프로젝트는 현재 마감되었으며, 제 브런치를 통해서 매주 도서 리뷰 형태로 게시될 예정입니다. (2019년 3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