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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r 07. 2019

산 책과 걷는 시간

늙지 않는 시, 《i에게》

도통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써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사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아득해진 날들의 빈칸을 유의미하게 채워보고자, 어쩌면 마지막 취미기 될 책 이야기를 이곳에서 풀어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걸으며 말했습니다. “어제는 아주 보람 있는 하루였다. 글 쓰고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라고. 매주 한 권의 책을 사고 일주일 동안 낯선 이야기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저야 대부분 서울 한복판을 걷겠지만, 언젠가 런던을 산책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김소연, 《i에게》


시를 모르지만 종종 시를 읽는다. 시를 안 읽는 사람이 보기에 나는 시를 즐겨 읽는 사람처럼 보이므로 종종 시집을 선물받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대낮이나 늦은 오후에 나를 떠올리며 생전 처음 서점에 들러 어쩐지 긴장된 손바닥으로 시집의 표지 따위를 슬쩍 쓸어 보았을 이들이야말로 진정 시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시를 모르고도 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그동안 아는 만큼 뻔뻔해왔던 걸 생각하면 차라리 모르고 짐작하는 편이 덜 창피할 테다), 시는 무언가를 기꺼이 하는 일 같기 때문이다. 기꺼이 꿈꾸고 기꺼이 슬퍼하고 기꺼이 불행하고 기꺼이 죽지는 못하고 기꺼이 연민하고 기꺼이 춤추거나 울고 기꺼이 먹고 잠들며 마침내 기꺼이 쓰는 게 시 같다. 그러니 여자애한테 처음 꽃을 건네는 남자애처럼 머뭇거리며 시집을 선물한 이들의 마음을 기꺼이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요 며칠 좋아하는 책방에 들를 때마다 시선을 뺏기던 시집이 있었다. 두껍고 육중한, 무엇보다 책등을 찢고 나와 내게 말을 걸 것 같은 적극적인 제목의 책들 사이에서 옅은 커스터드 크림색의 얇은 시집은 오히려 쉽게 눈에 띄었다. 마침 두 권이 나란히 붙어 있는 탓에 꼭 가르지 않은 젓가락 한 쌍 같아 보이기도 했다. 시집은 자백처럼, 독백처럼 이름 붙여져 있었다. 『i에게』라고. 세상의 모든 아이와 i를 생각하며 실로‘i’처럼 생긴 시집 한 권을 챙겨 나왔다. 책방에 홀로 남은 다른 한 권은 어떻게 되었을까. 뒤늦게 시집의 입장을 생각하며 표제작 「i에게」를 읽었다. 시인은 첫 행을 이렇게 써놓았다.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시인은 태생적으로 두 개의 모국어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 같다. 분명 내 나라의 언어로 쓰여 있는데 어설프게 배운 제2외국어를 짐짓 아는 체 하며 더듬더듬 읽는 기분이 든다. 우연히 고른 시가 유난히 난해해서도, 애당초 시라는 게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도 아니다. 그저 내가 시인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한 적 없을 뿐이겠지. 문제는 국적도 없는 이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데에 있는데 따지고 보면 시는 원래 노래였으니까, 가사의 뜻은 모르지만 멜로디나 귓가에 감기는 발음들이 좋아 즐겨듣는 외국노래라고 생각하면 또 그만이다. 시를 두고 심각해지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일도 없을 테니.


시를 모르므로 시는 참 무용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를 모르기 때문에 시란 참 아름다운 것이라 덮어두고 칭송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모르는 시들 사이에서 때때로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들키고 나면 나는 도무지 시를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어의 부재 표준국어사전의 부재 마침표의 부재 서사의 부재… 결핍이 많을수록 시의 완성도는 높아지는 걸까? 그러면 시를 읽고 울렁이는 마음들에는 얼마나 많은 구멍이 나 있는 건지, 나는 내가 너무 안쓰러워지고 만다.


망망대해의 시집에서 어쩌다 시 한 편을 건져 올리면 마음 사이로 짠 물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게 꼭 바다에 친 그물 같다.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애에 깨어날 수 있도록’ 이런 말들을 「경배」하는 나를 보면 엄마는 글 쓰는 딸을 더는 자랑스러워하지 않겠지. 올해 설날에는 용돈 봉투 뒷장에 ‘사과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니 벌써 용서받은 것 같다 용서의 허구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모르는 것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대는 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산 책과 걷는 시간>의 마지막을 올해의 첫 시집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감격스럽다. 무엇에 대해서도 쓰지 않고 보내는 대부분의 날들엔 차고 넘칠 정도로 부끄러워하다 잠이 드니 이정도 호들갑은 스스로 너그럽게 봐주기로 한다.


1월이 벌써 다 갔네

1월은 항상 그래왔다고 곧 2월이 온다고 말했다

2월도 항상 그러리란 걸 너는 예감한다

.

.

너는 다만 명랑하고 싶다

웃음소리로 1월을 끝내고 싶다

2월을 웃음소리로 보내고 싶다


_김소연, 「쉐프렐라」 中



*이 글은 작가 프로젝트 [an Editorial] 2월 첫째 주에 실린 원고입니다. 2019년 1월부터 2월까지 메일 발송을 통해 진행되었던 해당 프로젝트는 현재 마감되었으며, 제 브런치를 통해서 매주 도서 리뷰 형태로 게시될 예정입니다. (2019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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