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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r 07. 2019

산 책과 걷는 시간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는, 《죽는 게 뭐라고》

도통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써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사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아득해진 날들의 빈칸을 유의미하게 채워보고자, 어쩌면 마지막 취미기 될 책 이야기를 이곳에서 풀어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걸으며 말했습니다. “어제는 아주 보람 있는 하루였다. 글 쓰고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라고. 매주 한 권의 책을 사고 일주일 동안 낯선 이야기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저야 대부분 서울 한복판을 걷겠지만, 언젠가 런던을 산책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사노 요코, 《죽는 게 뭐라고》


지금도 별다를 바 없지만 그동안의 나는 먹고사니즘에 지독히도 성실했다. 근검절약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탓도 있겠으나, 내가 봐도 나는 그들보다 좀 더 악착같은 구석이 있다. 정작 내 부모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적어도 자신들의 어린 시절보다는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평생을 애썼는데도 나는 부모의 노고와 무관하게 결핍이 많은 아이로 자랐다. 그건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콤플렉스였다.

  나의 유년기와 십대를 돌아보면 부모에게 무엇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전에 (특히 물질적인 부분에서) 이미 대부분의 것들이 어느 정도는 충족되어 있었는데, 가령 이런 식이었다. 유난히 옷과 신발을 좋아하는 엄마 덕분에 나는 중학교 때부터 그녀의 옷장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아빠는 타지로 출장이 잦았던 탓에 딸이 느낄 당신의 부재를 용돈으로 채워주려 했다. 아빠의 낡고 얇은 반지갑 안에는 그나마도 모서리나 중앙부가 심하게 헤진 돈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빠는 개중에서 가장 빳빳한 놈을 골라 내게 주곤 했다. 문제는 모든 것들이 대개 나의 취향이나 감정의 타이밍을 고려하지 않고 제공되기 일쑤였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또래 친구들이 새하얀 나이키 포스를 신고 너나할 것 없이 레스포삭 가방을 멜 때 나는 엄마가 아끼는 가죽 백팩에 교과서를 넣고 그녀가 동대문에서 고민 끝에 골랐을 색깔이 화려한 운동화를 신었던 것이다. 어느 날엔 내가 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날들엔 은근히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애써 모른 체 했다. 유난히 후자의 기분에 사로잡힌 날이면 식판에 그날 가장 맛있는 반찬을 받다가도, 친구와 과일빙수를 먹다가도, 노래방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문득문득 모종의 죄책감 같은 걸 느끼며 스스로에게 마구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아마 나는 부모가 내게 주려한 모든 것이 자연한 여유에서 비롯된 게 아니란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딸을 둘러싼 세상에 지레 겁을 먹고선 다만 언제나 최선의 것을 마련해 펼쳐 보이고 싶었던 그 마음을. 문득 사십대 초반의 얼굴을 한 그 시절의 부모를 떠올리니 귀엽고 애틋한 기분이 든다. 젊고 미숙하고 그래서 뭐든 열성일 수 있던 두 사람.


그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무엇을‘원한다’라는 마음이 그다지 크지 않다. 아쉽게도 충만함에서 오는 무욕은 아니다. 무언가 바라는 마음을 염치없는 것이라 오독하며 자라버린 탓이다. 이제는 부모에게 때마다 얼마간의 용돈이나 선물을 주면서 제법 다 큰 자식 흉내를 내고 있지만 최근의 나에겐 아주 오랜만에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생겼다.

  난치병에 걸린 엄마가 그녀의 바람대로 오래 살아주는 것. 산속에서 심심해 할 엄마를 위해 아빠가 이제 그만 은퇴하고 그녀와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는 것.

  이제야 비로소 부모에게 요구할 거리를 찾았는데, 그들은 예전처럼 짐짓 당당하거나 자신 있는 체도 하지 못하고 나를 바라만 보고 있어 퍽 난감하다. 나 역시 십수 년 만에 칭얼대고픈 심정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버린다. 누구보다 그들 자신이야말로 이것들을 가장 크게 바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의 나라면 내게 처한 상황에 취해 마냥 슬퍼할 수도 있다(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이런 상황에 기대어 어차피 내 뜻대로 흘러간 적 없는 삶을 이때다 싶어 한껏 비관하며 보낼 수도 있다(내일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연한 얼굴로 사노 요코의 ‘뭐라고’ 시리즈 중 한 권인 <죽는 게 뭐라고>를 읽으며 2월을 보내고 있다. 워낙 유명한 에세이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제목의 뉘앙스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며 ‘그러게, 죽는 게 뭐라고’라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더랬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죽음에 자연히 무심한 채로 살았으니까.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일본 할머니가 남긴,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에세이는 목차가 등장하기도 전부터 담백한 위로를 툭하니 건넨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다.’

  그렇지. 죽지 않았으니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내일과 모레가 영원처럼 반복되는 삶에 익숙해진 채로. 그러나 인생은 사실상 죽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요코 할머니의 아버지도 딸에게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조언했는지 모른다. 실로 그녀는 암 선고를 받고도 거침없이 재규어를 몰고 죽음에 시니컬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아버지의 소신을 따랐다. 그러나 난, 아무래도 나의 부모가 목숨만은 좀 아꼈으면 좋겠다.

  그녀는 말한다. ‘무덤을 사거나 장례를 치를 절을 정하는 등의 준비를 해봐도, 살아 있으면 그만 잊어버리고 만다’고.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자꾸만 잊는다고. 이 대목에서부터 나는 엄마가 남은 생을 요코처럼 사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언제까지나 겨울에는 여름옷이나 신발, 액세서리 따위를 비교적 싸게 사들이면서 다음 계절의 제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자꾸만 많아졌다.

  어른이 되면 좀처럼 ‘꼴깍’ 죽지 못한다고 하는데, 울 엄마는 과연 얼마큼이나 어른인지 가늠해본다. 참 웃긴다. 자라면서 그토록 속으로 무시하고 때로는 은근히 멸시하기까지 했던 그녀를 이제야 어른 취급하려는 내 모습이. 손쉬운 자조는 돌연 요코 특유의 시크함을 향한 질투로 이어진다. 인생이라던지, 죽음이라던지에 대해 작가적인 마인드로 차분히 바라볼 수 있는 그녀와 달리 나의 엄마는 여전히 10년, 15년을 더 살고 싶어할 텐데. 겨우 내가, 그 미련의 가장 큰 이유인 채로 말이다.


  ㅡ가장 놀라운 건, 의외로 환자들을 진료하다가 여든이 넘은 할머님께서 약을 드리면 “선생님, 이 약 평생 먹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은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서 난처해져요.


엄마는 죽을 때까지 어떤 자세로 살고 싶어 할까. 평소의 나답지 않게 자주 그녀를 생각하며 지내느라 온 마음이 물에 불은 손가락처럼 쭈글거린다. 최근에는 짧은   소설 한 편을 썼다. 소설을 쓰는 동안엔 쉬이 눈물이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늘처럼, 아무런 문학적 장치도 없이 그녀를 쓰는 일은 실은 내겐 너무 버거운 일이다.



*이 글은 작가 프로젝트 [an Editorial] 2월 셋째 주에 실린 원고입니다. 2019년 1월부터 2월까지 메일 발송을 통해 진행되었던 해당 프로젝트는 현재 마감되었으며, 제 브런치를 통해서 매주 도서 리뷰 형태로 게시될 예정입니다. (2019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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