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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r 07. 2019

산 책과 걷는 시간

‘뜨끔’의 기록, 《비수기의 전문가들》

도통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써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사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아득해진 날들의 빈칸을 유의미하게 채워보고자, 어쩌면 마지막 취미기 될 책 이야기를 이곳에서 풀어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걸으며 말했습니다. “어제는 아주 보람 있는 하루였다. 글 쓰고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라고. 매주 한 권의 책을 사고 일주일 동안 낯선 이야기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저야 대부분 서울 한복판을 걷겠지만, 언젠가 런던을 산책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김한민, 《비수기의 전문가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왜 베를린에 가느냐고. 그러면 물어오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대답을 돌려주었다. 많은 보기를 준비했지만 예상처럼 혹은 예상과는 달리 나의 여행을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황한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곧 이런 식으로 되물었다. “아~ 그렇구나…. 근데 왜 하필 베를린에?” 짧은 이별의 순간이 가까워질 때마다 베를린에 가야 하는 이유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미처 답을 구하지 못하고 도착한 베를린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곤 했다. 왜 이곳에 왔느냐고. 새로운 보기로 애꿎은 전혜린 작가를 운운했던 것 같다. 그녀가 여태 살아 있거나 실제보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조금 더 그럴싸한 핑계였을까. 다행히 베를린에서는 한 손에 꼽고도 남을 만큼의 사람을 꼭 그만큼만 만났기 때문에 대부분의 날들은 안부나 호기심, 기타 번거로운 염려의 부재가 평화롭게 이어졌다.


모종의 해방감과 의도된 우울 따위에 취해 있는 것도 잠깐이었다. 제 존재를 설득하거나 증명하려 하지 않고 (하지만 누구에게? 또 어떻게?) 이다지도 아늑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문득 죄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자 여행 중 발견되는 나의 취향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홈플러스에서 양배추 반통을 사도 그람수와 십 원 단위까지 비교하는 인간이 이곳에서는 유기농 마트만 골라 장을 보는 심보가. 머물던 내내 매일같이 비가 내렸는데 우산을 써도 속수무책으로 젖는 몸과 마음을 말린답시고 외출 할 때마다 몰이해로 가득한 미술관에 들르려는 고집이. 인생에 몇 안 되는, 무지로부터 비롯된 무해가 도처에 널려있는 때였다. 그래도 며칠 간 결핍된 스스로를 마주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후련해졌다. 겸손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존재는 안심하는 듯했다.

  드물게 해가 뜨면 광장의 카페테라스를 찾았다. 볕이 귀한 계절이었으므로 턱 끝까지 머플러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빼곡했다. 도로를 장악한 이름 모를 퍼레이드 행렬, 도무지 짖을 줄 모르는 이곳 개들의 낮잠 위로 쏟아지는 햇살과 도무지 단잠을 모르고 요란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만국 공통의 아이들─틈에서 구겨져있던 기분을 슬며시 펼쳐 널었다. 미세먼지 대신 담배연기와 호흡하며 챙겨온 사과를 꺼내 씹다 보면 어느새 테이블 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평안한 소란함이 삽시간에 지워지면 도망치듯 인근 미술관을 검색하고, 한아름 장거리와 돌아가는 익숙한 낯선 하루. 베를린에서의 날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반복됐다.

  두 달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제 중요한 건 왜 베를린이었는지가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로 바뀌어 있었다. 종종 무엇을 ‘썼는지’ 묻는 이도 있었다. 그건 너무 절망스러운 기대였다. 나는 머뭇거리다 4월에도 종종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지 않은 거의 모든 날들엔 비가 내렸다는, 비수기의 날씨를 장황하게 묘사하며 입을 뗐다. 사람들은 중간에 말을 자르고 물었다. “도대체 왜 간 거야?” (고마워. 덕분에 베를린에서 무엇을 했는지 끝내 함구할 수 있었어.)


《비수기의 전문가들》이라는 ‘그림소설’을 읽는 동안 2년 전 내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말하자면 비수기의 비기너였던 나. 이야기에는 문득 다시 살고 싶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져서 떠나는 남자가 등장한다. 정작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채우지도 못하고 비행기에 오르고 말지만. 무작정 도망간 그 남자에게서 오랜 시간 잃어버린 내 답을 찾아보려고 했건만 웬걸, 같이 오답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말한다. ‘익숙해지는 게 삶이고 익숙해지는 게 인간인데 도무지 그게 안 된다’고. 아아 이 사람도 참 딱하다. 삶을 객관화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피곤해질 텐데. 생각하자마자 나는 뜨끔한다. 챕터 몇 개가 멈칫하기를 반복하며 넘어간다. 자기연민이 이렇게 심한데 삶을 주관적으로 못 보는 것도 재주지 재주야. 이쯤에선 눈물이 차오를 것 같다.

  실로 ‘비수기의 전문가’답게 남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을 찾는다. 이해할 수 없거나 아니면 이해할 필요조차 없는 것들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고 분노한다.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서 좋을 것 없는 일에는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한다. 이따위로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데에 환멸을 느끼지만 누구나 지나치는 세상의 면면에 홀로 시선을 둔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내는 것 같았는데,

  그는 돌연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책을 쓰면 무언가 하나, 아무리 못해도 단 하나의 의미는 긍정하지 않곤 못 배길 거라는 심정으로 무의미의 마침표나마 끝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잠시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무언가 쓴다는 건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뜻이니 참고 더 읽어보기로 한다.

  그는 노래, 담배, 커피, 신문, 전화기 등 시간을 맨몸으로 마주하는 데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다가 결국 의도치 않게 ‘만사의 가치를 음미하는 구조로 삶이 재편성돼’ 버리고 만다. 역시! 전문가다운 전개다. 이야기는 이제 보다 문학적으로, 보다 적극적인 비극으로 흘러간다. 그가 정말로 원했던 ‘새로운 삶’을 향해.


…… 그해 이른 봄. 지나친 명랑함에, 일상적인 우울함에, 끝이 없는 무료에 잠식되지 않으려 썼던 베를린 일기장을 펼쳐본다. 기억에 없던 감상들이 곳곳에서 마중 나와 퍽 당황스럽다. 그 시절 내가 긍정하고 싶던 단 하나는 무엇이었을까 다시금 더듬어봐야겠다. 곧 비수기의 날들이 돌아올 테다. 고장 난 나침반 같은 그 시기에 나는 무엇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남자가 떠나기 전 집요하게 체크했던 리스트를 아래에 공유합니다. 만약 이 모든 걸 충족시켜주는 ‘당신만의’ 나라를 찾게 되어도 절대로 비수기의 전문가가 되어볼 것을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1. 물가가 싸다

2. 소음이 적다

3. 문화 행사들이 이따금씩 일어난다

4. 규모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다

5. 차 없이도 걸어서 다닐 수 있다

6. 산책하기 좋다

7. 내전이 없다

8. 치안이 괜찮다

9. 치안이 지나치게 좋지도 않다

10. 내가 살던 데서 멀다

10-1. 내가 살던 나라 사람들이 적다

11. 거리에서 가래침 뱉는 사람이 없다(적다)

12. 인터넷으로 필수적인 정보는 구할 수 있다

13. 괜찮은 서점이 세 군데는 있다

14. 나쁘지 않은 공공 도서관이 있다

15. 공원을 찾기 어렵지 않다

16. 좋은 시인들이 한두 명은 있(었)다

17. 시를 연구하는 대학이 있다

18. 입학이 쉽고

19. 등록금이 없거나 터무니없이 싸고

20. 영어 시험 점수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21. 비자 받는 과정이 간소하다

22. 그곳으로 가는 싼 비행기 표가 있다

23. 규제 많은 종교가 없다

24. 최소한 알파벳 문자를 쓴다

(즉, 문자부터 새로 익히지는 않다고 된다)

25. 아직도 아름다운 풍경을 약간은 간직했다

26. 공기가 나쁘지 않다

27. 너무 더워서 집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거나

28. 매일같이 모기와 전쟁을 해야 하는 곳 말고,

29. 너무 추워서 난방비를 감당 못 하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게 되는 곳 말고,

30. 해가 너무 짧아서 우울해지는 곳 말고,

31. 핸드폰 없이도 사는 게 가능하다

32. 섬이 아니라서 다른 나라로 이동이 쉽다

33. 이 모든 걸 돈 없이도 할 수 있다, 는 무리겠지만 최소한, 아주 적은 돈으로 가능하다

34. 외국인 물가가 따로 있지 않다.

35. 외국인이 적당히 있어서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36. 인종차별이 피부로 느껴지진 않는다

37. 지나친 민족적 자부심 같은 게 없다

38. 관광 명소가 아니다

39. 사람들이 불친절하거나 공격적이지도,

40.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다.

41. 나라 이름이 마음에 든다.

42. 왠지 모를 흥미가 느껴지는 곳이다…


“당연히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한 군데 찾아냈다.”p.33



*이 글은 작가 프로젝트 [an Editorial] 1월 마지막 주에 실린 원고입니다. 2019년 1월부터 2월까지 메일 발송을 통해 진행되었던 해당 프로젝트는 현재 마감되었으며, 제 브런치를 통해서 매주 도서 리뷰 형태로 게시될 예정입니다. (2019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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